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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따개는 죽었어! 이제 더는 없어!

내 옹졸함에 부쳐

by 김고양

땀에 절어 일어나던 아침도, 말 그대로 숨 막히던 오후 세시도 당분간은 안녕이다. 그보다 여름의 끝이 반가운 이유는 따로 있는데, 섹시한 밤바람이 불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반팔 소매와 허리춤으로 찬바람이 들어올라 치면 내 몸은 화들짝 놀라 살짝은 움츠러든다. 예상치 못한 네 손길이 다가올 때처럼. 밤바람에 흥분하다니 너무 어이가 없어 처음엔 일상생활이 가능한 수준인가 자괴감이 들었지만, 어찌 사람이 좌절하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어느샌가 나는 밤공기가 차가워지기를 기다리는 당당한 변태가 되었다.


그러니까 병따개 대가리를 부숴트린건 다름 아닌 밤바람이다. 놈은 바지런한 악당인 게 틀림없다. 건실한 청년을 변태로 바꿔버린데 만족하지 않고, 냉장고 한 부분을 장식하는 내 유일한 병따개마저 노렸으니.

놈의 은밀한 작전은 며칠전에 이루어졌다. 미지근한 물로 샤워를 하고 욕실을 나온 내게 그 차가운 밤공기가 달려든 것이다. 내 몸은 속절없이 반응했고, 나는 하염없이 작고도 작은 경련을 즐겼다. 이렇게 섹시한 장면엔 자신을 파괴하는 행위가 어울리기 마련이니, 탄산수 한 병으로 내 식도를 파괴하는 성스러운 행위를 건너뛸 순 없었다. 고로 냉장고 문을 패기롭게 열어제꼈고, 냉장고에 붙어있던 병따개가 떨어졌다. 그렇게 내 유일한 병따개가 박살이 났다. 병따개는 죽었다. 이제 더는 없다. 싱가폴 여행 기념으로 사다준 멀라이언 병따개는.


너는 친구와 싱가폴을 다녀왔다. 예나 지금이나 못나기로는 당할 자가 없는 난 네 여행을 못마땅해했다. 내 머릿속은 온통 어디선가 주워들은 여행지의 일탈뿐이었다. 누구는 여행 가서 클럽만 다녔다더라. 야경을 구경하다 눈이 맞았다더라. 여성 여행자들은 작업의 주 타겟이라더라... 태반이 인터넷 세상 귀퉁이에서 읽은 것들일 텐데, 네가 여행을 떠난다고 하니 안 그래도 옹졸한 내 속은 달고나처럼 졸아 딱딱하게 굳어갔다. 여행 가는 게 그렇게 싫으면 안 가겠다는 조심스러운 너의 말은 숨어있던 내 부끄러움을 일깨우는데 충분했다. 찌질해도 정도껏 찌질하자는 내 신조를 지킨 건지 못 지킨 건지는 아리송하지만, 나는 잘 다녀오라 인사를 건넸다.


그래, 네가 사 온 병따개를 보고 심통에 심통을 부려댔던 건 내 옹졸함의 발현이었다. 굳이 평소엔 따지지도 않던 '실용성'을 들먹이며, 너의 센스 없음을 타박했다. 여행 가서 내 생각에 사온게 고작 사자머리에 인어 몸통인 병따개냐고, 평소 자취방에서 병뚜껑을 몇 번이나 까겠냐고. 이미 죄스러운 여행이었을 텐데 네 어깨는 더 풀이 죽었다.


네가 준 병따개는 싱가폴의 상징인 멀라이언이었다. 사자 머리에 인어의 몸을 한 멀라이언이 병따개 손잡이에서 헤엄쳤다. 멀라이언. 말 그대로 mermaid의 몸에 lion의 머리. 두 종의 신체를 반반씩 붙인 것도 어이없기 짝이 없는데, 심지어 그 짐승이 육지의 왕과 바다의 전설이다. 이 정도면 기괴하기로는 당할 자가 없다. 게다가 무려 병뚜껑이라니! 정말 기괴하고도 무쓸모 하다고 생각했다.

그 후로 몇 년이 지나 악마 중의 악마 밤바람이 멀라이언 병따개를 앗아가고 나서야, 멀라이언이야말로 내 생의 목표로 삼아야 하는 대상이라는 걸 깨달았다. 각자 다른 존재가 하나를 이룬다. 스무 해를 넘게 다른 존재로 살아온 내가, 전혀 다른 존재인 너를 만나 하나가 될 수 있을까. 아니 너는 충분히도 가능한 사람일 텐데, 과연 나는 그러한 사람인 걸까.


네게 전화를 걸어 떠듬떠듬 말을 이었다. 병따개를 부숴먹었다고. 그때는 정말 미안했다고. 지금 생각하면 각국 병따개를 사모으는 건 충분히 좋은 수집인 것 같다고. 끝내 나는 멀라이언이 되기엔 한참 부족한 사람이라는 말은 하지 못했지만, 너는 내가 좋은 쪽으로 변화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고마운 건 나다. 너는 천천히 나의 조각들을 맞춰간다. 너는 나를 완성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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