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쩌면 감사해야만 한다.
오랜만에 만나서 길을 걸었다. '형네 회사 공채 떴던데요.'라는 안부 비슷한 말에 무심코 후배들에게 이야기하듯 대답해 버렸다. '써볼래? 좋진 않지만 나쁘진 않아 세전 사천은 맞춰줘.'
미래도, 연봉 상승률도 개망인걸 다들 알고 있어서인지 잘해봐야 중견기업인 우리 회사엔 동문들이 잘 없다. 그래도 취업 준비할 땐 간절해지기 마련이니 가끔은 내게 물어보는 후배들이 있다. 그들에게 말하던 버릇대로 툭 던졌는데, 문제는 '슈니첼'과 '멍또'는 동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평소 돈 없다 돈 없다 해서 진짜 걱정했더니 고액 연봉자라며 부러워했다. 실수다. 짧은 부러움 뒤엔 진한 상실감이 몰려오기 마련이다. 입이 방정이다.
'멍또'와 '슈니첼'은 게임을 같이한 우리 길드원이다. 하라는 레벨업은 안 하고 둘이 보이스 채팅으로 농담을 따먹는가 하더니 어느 날부턴가 연애를 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우리 다 그 게임을 접고 뿔뿔이 흩어졌지만 그때 인연으로 두어 달에 한 번씩 밥을 먹곤 한다.
삼겹살 집에서 고기를 먹다 말고, '슈니첼'은 다음번엔 드라이브를 꼭 꼭 시켜달라고 당부를 했다. 사실 몇 달 전에 나는 작은 소형차 하나를 샀다. 그들은 내심 이번에 차를 끌고 오길 바랬던 모양인가 보다. 꼭을 두 번이나 말한 것을 보니. 가만히 지켜보던 '멍또'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형님 차에 매트리스 들어가요?'
방금 전까지 드라이브를 시켜주겠다며 으쓱대던 내 어깨가, 매트리스 이야기에 신명을 잃었다. 겨우 개코만한 소형차에 매트리스를 어찌 집어넣는단 말인가. 당황스러워 차 사이즈를 잠시 헤아리는 척을 했지만 그게 가능할 턱이 없다. (물론 이제와 생각해보니, 에쿠스에도 매트리스는 안 들어갈 것 같긴 하다.)
실망한 '멍또'의 표정을 '슈니첼'이 설명해줬다. 자기가 조만간 이사를 하는데, 용달차를 부르려니 값이 너무 비싼 거 같다고. 자취 살림이 뻔하니 다른 건 대충 나를 수 있겠는데 매트리스를 나를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사 거리가 1km가 되지 않는 것 같아서 그냥 손으로 나르면 된다고 대충 말해줬다. 뭐 짜장면 한 그릇 사주면 내가 도와준다고 다음 모임은 그때 하면 되겠다고 하고 대충 넘어갔다.
'멍또'는 3D 캐릭터 모델러다. 사실 난 잘 모르는데, 게임 캐릭터를 만드는 일이라고 했다. 저번 모임에서 그는 자기가 참여한 게임이 나왔다고 보여줬는데 무려 일본 명작 시리즈 '드래곤 퀘스트'였다. '슈니첼'도 디자이너라고 했는데 2D라고 했다. 이번에 회사를 새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말에 적잖은 축하를 건넸다.
이야기는 흐르고 흘러 너네 결혼 언제 하냐는 이야기를 던졌다. 5년 뒤에 할 거라는 말에 나는 둘이 5년 모으면 1억으로 전세값 할 수 있겠다! 라고 오지랖을 떨었다.(물론 둘이 5년간 1억 모으는 건 그들의 사정을 내 딴엔 충분히 배려한 액수였다.) 그건 어렵겠다고 '멍또'가 찬찬히 입을 열었는데, 잠깐 들어보니 연봉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슈니첼'은 여자라서 그런 건지 분야가 달라서 그런 건지 조금 더 적게 버는 모양이다. 그래 내가 항상 위를 보면서 투덜대던 대로 세상은 참 불공평한 것이었다. 옹졸한 내 마음이 창피해 질 만큼.
아 또 실수다 싶어 이번 모임에 못 나온 길드 마스터 형 이야기를 하다가 조금 이르게 자리를 파했다. 빙수집 앞에서 헤어지려는데 '슈니첼'이 너무나도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삿날에 도와줄 수 있냐고. 용달차가 아무리 적어도 10만 원은 할 것 같다고.
어쩌겠나. 너네가 이렇게 해맑고 애틋하게 살아가는데, 너네가 사는 짜장면 한 그릇 얻어먹으러 가야 하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