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창공원에 다녀왔습니다
인터넷에서 누군가는 서거일도 아니고 사형선고일을, 게다가 국가가 지정한 공휴일도 아닌데 기릴 이유가 없다고 했다. 나는 발렌타인데이에 효창공원에 왔다. 그렇다고 연인들이 초콜릿으로 나누는 사랑법을 중지하고, 공원에 와서 헌화하고 참배하라 말할 생각은 없다. 어느 누리꾼 말마따나 별이 진 날도 아니고, 국가 기념일도 아니지만. 선열의 넋을 기리고 싶은 자는 언제든 그의 죽음 앞에 엎드려 존경을 표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언제라도 헌화는 하면 되는 거라고.
날씨가 급격히 더워졌다. 남방 위에 조끼, 롱패딩을 걸쳤을 뿐인데 더웠다. 한국인이 유행에 민감한 건, 사계절 자주 바뀌는 날씨 때문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에 반해 공기는 차가웠던 건지 안경에 김이 서렸다. 진로를 가로막는 마스크를 우회해 공기가 위쪽으로 올라왔다. 어느 만화에서였다. 안경잡이에게 가장 수치스러운 순간은 뜨거운 라면을 허겁지겁 먹다 고개를 들었을 때, 안경에 김이 서린 바보 같은 모습을 보였을 때라고.
'수치플이구만'
우리 동네에선 버스정류장 바람 차단막을 따숨소라고 한다. 따숨소가 필요 없는 날씨였다. 버스를 기다리다 서 있기 싫어서 앉았다. 의자에 열선이 있어서 엉덩이가 뜨거웠다. 엄마 찾는 염소의 마음이 되어 구조되고 싶었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면서 효창공원으로 출발했다. 월말과 연초에 겪은 장염과 대상포진 그리고 중국발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외출이 오랜만이었다. 한강을 보는 건 더더욱 오래간만이었다. 반가웠다. 빛나는 강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파트가 번져서 물이 하얬다. 마포대교가 번져서 물이 붉었다. 하루종일 창문만 바라볼 수 있는 영화관이 있다면 여기가 좋을 것이다.
강을 건너 어느 정류장에 버스가 멈춰 섰다. 아무도 타지 않았다. 정적 이후에 기사님이 내리셨다.
"화장실 다녀올게요! 죄송해요"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았지만, 기사님도 사람이니까... 하는 공기가 흘렀다. 나는 버스 뒷문으로 하차할 때마다 동물원에서 구경당하는 동물이 된 기분이 들곤 한다. 기사님은 오죽했을까. 웬만하면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순간을 들켰으니. 발가벗겨지는 기분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용무를 해결했다는 기쁨이 더 크셨을까? 아, 여기까지만 하자.
마스크를 끼면 어째서 고약한 냄새가 날까. 내장 냄새라도 되는 걸까. 마스크 자체의 냄새인가. 딴생각하다 그만 내릴 곳을 지나쳤다. 여기가 어디지? 큼지막하게 서울고용노동청, 글자가 보였다. '서울백병원, 국가인권위, 안중근 활동 터'가 정류장 이름이었다. 버스에서 내리고 환승할 곳을 찾아 재촉했다.
어디서 좋은 음악이 들렸다. 인권위 정문 앞이었다. 누군가 플랜카드를 지키고 서서 앰프로 음악을 틀어놓았다. 투쟁하는 사람들답지 않게 감성적인 노래를 틀었다 싶었다. 음악검색 앱 '샤잠'을 켰다. 차량 신호등에서 녹색불이 켜졌다. 노래가 들리지 않았다. 다음 보행 신호가 되었을 때는 일반적인 민가로 바뀌었다. 나는 횡단보도를 건넜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네"
"아까 전에 노래 뭔지 알 수 있을까요? 너무 듣기 좋아서요"
"아 그거요. 선한 능력으로. 독일 목사님 노래에요"
"독일 목사님이요? 제목이 뭐라고 하셨죠?"
"선한 능력으로. 유튜브 치시면 어떤 할아버지가 혼자 노래하는 거 나와요"
"유튜브에 쳐보세요"
"아, 네 감사합니다"
좋은 노래를 알게 됐고, 알려주신 것이 감사해서 무엇을 하시는 건가 여쭈었다. 내가 현수막에 쓰인 글을 읽으며 말했다.
"청소년 에이즈 급증... 이게 무슨 말이에요?"
"아 그게 2000년 초반에는 청소년 에이즈 환자가 4명인가 그랬어요" "근데 최영애 인권위원장 들어오고 나서 동성애 어플이 다 공개가 됐어요"
"공개요?"
"그게 다 허용이 된 거죠 지금" "그래서 이게 바텀 알바라고..."
"무슨 알바요?"
"바텀 아시죠?"
"아 그거요"
"바텀 알바라고 위기 청소년들이 그거에 노출이 돼서 에이즈 감염자가 확 늘어났어요"
"아.. 심각하네요 그거"
"거기다가 학생인권조례 때문에 이제는 학교 선생님들을 자기들 마음에 안 들면 고발해버리고요"
"아..."
주의 깊게 듣는 동안 일행분이 내게 전단지를 건넸다. 나는 내용을 찬찬히 살핀 다음, 세 번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랬군요... 열심히 활동하세요! 노래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가세요"
나는 곧장 정류장으로 갔다. 다행히 여기 의자엔 열선이 없었다. 한겨레신문사 앞에서 내렸다. 나는 어제 아빠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아빠 나 내일은 효창공원 좀 다녀올게"
"어 왜?"
"한국사 시험공부 할 때 알았는데, 발렌타인데이가 안중근 의사께서 사형 선고받으신 사형 언도일이래"
"아 그래?"
아빠는 놀라시면서도 기특하다는 표정을 지으셨다.
"오우야, 잘 생각했다"
"아빠도 언제 참배 드리러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우 장하다"
"가서 헌화하고 오는 거야?"
"헌화도 할 수 있어요?"
"그럼"
"사형 집행일이 아니고 선고일인데도?"
"언제라도 헌화는 하면 되는 거야"
"아아 그렇구나. 국화를 한 송이씩도 파나?"
"그럼"
"얼만데?"
"2,000원"
"싸네"
"헌화하고, 두 번 절 드리고 와"
국화를 사러 꽃집으로 갔다. 네이버 지도엔 분명 나오는데. 한참 찾다 전화해보니 없는 번호다. 다른 곳으로 갔다. 전화를 해보고 갈걸. 거기도 없는 번호다. 지치기도 하고 하는 수 없이 곧장 공원으로 갔다. 어르신들이 실버볼을 하고 있었다. 웹툰으로만 봤지, 직접 보긴 처음이다. 어떤 할아버지 차례였는데, 에이스로 보이셨다. 솜씨 좋게 하얀 공을 때려 맞추고 빨간 공을 경기장 밖으로 몰아냈다. 빤히 쳐다보는 것이 민망하실까 그만 발을 돌렸다. 뒤쪽에는 컨테이너가 있었다.
「효원 배드민턴 클럽」
할머니 셋이서 재미나게 화투를 치고 계셨다. 삼의사묘(三義士墓)를 찾아 나섰다. 삼의사묘에는 안중근 의사와 다른 의사 두 분께서 안치된 곳이다. 길을 잘못 들어 웬 건물로 갔다. 대한노인회라는 작명 센스가 특이한 곳이었다. 내려가면서 산책하는 분에게 물었다.
"삼의사묘가 어딨는지 아시나요?"
"쩌기 의열사 지나서 옆으로 가면 있어요"
"아 저기요 저기? 저기를 통해서?"
"네 네"
"감사합니다"
의열사 앞쪽 문을 통과하려는데, 뒤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손주와 함께 오신 할머니였다.
"오늘이 안중근 의사가 사형 선고받은 날이야"
꼬마는 잠자코 듣고 있는지 아닌지, 할머니 손을 잡고 자기 발을 축 삼아 빙글 돌았다.
"오늘 그거 때문에 일부러 오신 거에요?"
"아뇨. 그냥 들렀는데, 요 앞에서 사진 찍으시던 분이 말하는 걸 들었어요"
"아 그러셨구나. 잘 보고 가세요"
"예~"
나는 두 사람보다 먼저 삼의사묘에 도착했다. 삼(三)의사묘라는 이름과는 달리 네 분 의사의 묘가 있었다.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아직 찾지 못했기에, 그래서일까? 가묘 상태라 정식 묘로 셈하지 않았나 보다. 제일 왼쪽의 안중근 의사 묘와 묘비 옆으로 이봉창 의사, 윤봉길 의사, 백정기 의사의 묘와 묘비가 있었다. 누군가 와서 헌화한 흔적이 있다. 상석 왼편 잔디 위에 포장지 싸인 한 송이 국화가 놓여있었다.
인터넷에서 누군가는 서거일도 아니고 사형선고일을, 게다가 국가가 지정한 공휴일도 아닌데 기릴 이유가 없다고 했다. 나는 발렌타인데이에 효창공원에 왔다. 그렇다고 연인들이 초콜릿으로 나누는 사랑법을 중지하고, 공원에 와서 헌화하고 참배하라 말할 생각은 없다. 어느 누리꾼 말마따나 별이 진 날도 아니고, 국가 기념일도 아니지만. 선열의 넋을 기리고 싶은 자는 언제든 그의 죽음 앞에 엎드려 존경을 표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언제라도 헌화는 하면 되는 거라고.
패딩을 누런 잔디 위에 벗어두었다.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나는 돌바닥에 엎드려 두 번 절했다. 묘 뒤쪽 봉긋이 솟은 동산 중턱에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 고양이와 눈이 마주쳤다. 고양이는 영묘한 존재라고 하지 않나. 의사님들의 영혼이 고양이를 통해 이 문안객을 볼 수 있다면, 나를 반가워 해주시기를.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버지께 드릴 페레로 로쉐를 샀다.
「오늘은 안중근 의사의 사형 언도일이었습니다.」
효창공원에 다녀왔습니다. 20.02.14.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