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손끝

by 김한아

할머니의 부고 소식을 전해듣자마자 수애는 본가에 들려 엄마가 부탁한 것들을 챙겨 장례식장으로 출발했다. 할머니의 죽음에 대한 놀람은 있었지만, 당장 큰 충격이나 슬픔은 없었다. 이미 4년 째 병원에서 지내고 계셨고 엄마에게 종종 할머니의 건강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사실 수애는 할머니와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함께 놀고 있을 때 한 친구가 할머니와 살갑게 전화를 하는 걸 보며 수애는 놀랐다. “너 할머니랑 엄청 친하구나” 그렇게 묻는 수애를 다른 친구들이 더 이상한 듯 보며 물었다. “넌 안친해?” 그때까지 수애에게 할머니는 할머니였다. 제주도에 사시고 1년에 한 번 정도 뵙는 엄마의 엄마. 수애도 할머니도 넉살 좋은 성격은 아닌지라 할머니와 그렇게 살갑게 전화를 하는 친구가 신기했을 뿐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수애는 자신이 할머니와 별로 친한 사이가 아니구나, 생각했다.

얼마나 잤을까. 수애는 눈을 떴다. 방 안에 들어오는 햇살이 강한 걸 보니 벌써 점심 때는 지났으리라. 수애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수애의 눈에 작고 노란 귤이 들어왔다. 얼마전 시장에서 싸길래 한바가지 사온 귤이었다. 자고로 귤은 하나를 꺼내 먹다가 2개가 되고 3개가 되고 그러다가 한 박스 먹게 되는 법. 귤을 보니 군침이 돌았다. 새콤달콤한 그 귤향이 벌써 입안 가득 퍼지는 것 같았다. 수애는 사온 귤을 모두 꺼내 소파로 가 앉았다. 수애가 귤 가운데에 엄지를 넣어 껍질을 까지 시작했다. 귤이 작고 껍질이 얇아 자꾸 끊어지고 여린 귤살이 껍질에 붙어나왔다. 손에 귤즙이 묻어 찝찝했지만 그래도 다 깐 귤을 입안에 넣고 와작 씹으니 입 안 가득 상큼한 귤즙이 퍼졌다. 수애의 턱과 손가락이 쉬지 않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귤을 씹는 동안 수애의 손가락은 다시 귤을 까기 시작했고 그 깐 귤을 다시 씹을 동안 그 다음 귤을 까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니 귤을 사먹는 건 참 오랜만인 것 같았다.

할머니는 제주도에서 귤농장을 하셨었다. 덕분에 겨울이 다가오면 수애네 집에는 커다란 귤박스가 늘 집 한 켠에 위치해 있었다. 귤의 크기는 제각각 이었지만 그래도 모두 윤기가 흐르는 노란 빛깔을 띄었다. 오며가며 5개씩 집어 먹어도 귤이 너무 많은지라 썩어서 버리는 귤도 꽤 있었다. 특히 잘 까지지 않는 귤이 있으면 까다가 속이 터져 그대로 두고 다른 귤을 찾기도 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달랐다. 추석 때 할머니 집에 가서 함께 귤을 먹으면 할머니는 수애가 귤을 하나 깔 때 서너개를 까서 수애 앞에 두었다. 그래서 할머니 집에 놀러가면 언제든 먹고 싶을 때 수고스럽게 껍질을 깔 필요 없이 귤을 먹을 수 있었다. 수애는 까던 귤을 내려놓았다. 마지막으로 할머니가 수의를 입고 누워계시던 모습이 떠올랐다. 주름진 얼굴, 굳게 닫힌 눈, 하얀 수의, 그리고 손끝. 할머니의 손끝은 늘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엄마는 할머니가 귤농사를 오래 지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수애는 자신의 손끝을 내려다 보았다. 아까 묻은 귤즙이 손톱 사이로 스며 들어있었다. 할머니의 부고를 들었을 때도, 할머니의 빈소에서 자리를 지킬 때도, 할머니의 입관을 볼 때도 느끼지 못했던 할머니의 죽음이 손끝, 그 한 곳에서부터 뼈저리게 실감되었다. 수애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새콤한 귤향이 은은히 베어있었다. 어느새 창으로 들어온 노을빛이 수애의 머리위로 천천히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