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스마일〉 보고 왔다
<내일을 향해 쏴라>는 어렸을 때, 주말의 명화에서 봤다. 구체적인 스토리는 잘 기억이 안 나는데, 그 유명한 마지막 장면만은 생생하게 기억난다. 주인공 부치 캐시디와 선댄스 키드가 권총을 들고 밖으로 달려 나가는 장면. 밖은 이미 포위된 상태고 나가면 당연히 총알 200발 맞고 죽는 상황인데, 마치 일전을 벌이겠다는 듯 자신감 넘치는 발걸음으로 몸을 낮추고 뛰어나가는 두 사람. 멋지게 뛰어 나간 상태에서 화면은 정지하고 "Fire!" 외침과 함께 거의 폭탄 터지는 수준으로 총소리가 들린다. 엄청 추하게 죽었을 것 같은 두 주인공의 모습은 화면에 없다. 강도이지만 우아하고 여유 넘쳤던 두 사람의 마지막은 당당한 질주의 순간에 그대로 멈춰 있다.
선댄스 키드, 로버트 레드포드가 은퇴를 선언하고 마지막 작품을 내놨다. 제목은 <The Old Man and the Gun>. 노인과 바다를 패러디한 '노인과 총'이라는 제목인데 한국에선 '미스터 스마일'로 개봉했다. 나이 일흔에 철옹성 같은 감옥에서 탈옥한 전설적인 도둑 포레스트 터커의 실화를 영화로 만들었다. 부치 캐시디와 선댄스 키드도 실화였는데, 정말로 옛날에는 '우아한' 범죄자라는 게 존재했던 모양이다.
포레스트 터커는 정장 차림으로 은행에 들어가서 차분하게 총을 겨누고 가방에 돈을 담아 나온다. 그 누구에게도 불편(?)을 끼치지 않고 아주 조용히 강도짓을 벌인다. 일이 끝난 후에도 서둘러 탈출을 하는 경망스러운 짓은 하지 않는다. 미소 띤 얼굴로 청록색 세단에 올라타서 아름다운 자연을 둘러보며 떠날 뿐. 표정만 봐서는 귀에 꽂고 있는 이어폰에서 도청 중인 경찰 무전이 아니라 재즈 음악이라도 나오는 것 같을 정도다. 도로에서 퍼진 차를 수리하고 있던 쥬얼(씨시 스페이식)에게 접근할 때도 여유가 넘친다. 경찰을 따돌리려 지나가는 여자 붙잡고 키스하는 폭력적이고 전형적인 드라마 장면과는 거리가 멀다. 경찰 따돌리려는 게 아니라 진짜 마음에 들어서 차를 세웠나 싶을 정도로 우아한 발걸음.
범죄자인 걸 알고도 인간적으로 포레스트를 챙기는 쥬얼, 포레스트를 추적하다 인간적인 흥미를 느끼는 경찰 존 헌트, 돈 뜯기고도 "우아한 신사였어요" 같은 멘트를 날리는 은행 지점장을 이해할 수밖에 없다. 여유와 우아함이 갖는 힘은 정말 대단하다. 포레스트를 보고 있으면 도둑질은 저 사람이 하는 일일 뿐이야, 저 사람의 전부가 아니야, 마음만은 따뜻하겠지..;; 이런 이상한 생각이 든다.
"갖춰 입는 것은 중요해. 뭘 알고 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거든. 실제로는 모른다고 해도 말이야." 식당에서 존 헌트를 우연히 만났을 때, 포레스트가 던지는 이 말은 이 영화의 주제처럼 들렸다. 우아할 것, 우아할 것, 그리고 우아할 것.
80년생인 감독 데이빗 로워리는 이 영화와 관련해 얘기하다가 어렸을 때엔 우아한 도둑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잔인한 악당만 있다며 아쉬워했다. 생각해 보니 그렇다. 히어로물이 급증해서 그런지 요즘 악당들은 생긴 것부터 무지막지하고 이유도 없이 악행을 일삼는 그냥 악의 총체다. 사정도 있고 사랑도 있었던 과거의 악당이 그리울 만도 하다. 내 기억엔 <히트>에서 로버트 드 니로가 연기한 닐 맥컬리가 우아하고 세련된 범죄자 계보의 마지막이다.
로버트 레드포드는 멸종 위기에 놓인 우아한 악당 캐릭터로 남고 싶었던 것 같다. <내일을 향해 쏴라>의 첫 장면에 등장하는 ''This story is mostly true'를 패러디한 문구 'This story , also, is mostly true'로 시작하는 영화에는 <스팅>, <내일을 향해 쏴라>에서 로버트 레드포드가 연기한 우아한 범죄의 장면들이 그대로 등장한다.
쥬얼 앞에서 경찰에 잡히고 수감 생활을 하다 출소한 포레스트는 끝까지 강도짓에 대한 애정(?)을 버리지 못한다. 쥬얼에게 잠깐 뭐 사러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는 존 헌트에게 전화를 걸고 다시 은행을 턴다. '이제 은행 터는 건 싫증 났냐'는 존의 말에 '아닌 것 같다'고 얘기하는 포레스트의 표정은 정말 행복해 보인다. 은행을 털고 경찰에 쫓기는 것이 그에게는 정말로 순수한 즐거움이었던 거다.. . "It's not about making a living. It's about living." 포레스트의 대사처럼, 먹고살려고 하는 일이 아니라 삶 자체인 일. (그게 도둑질;;)
이 영화는 로버트 레드포드의 연기 인생에 대한 헌사다. 포레스트 터커의 강도짓을 로버트 레드포드의 연기로 바꾸면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된다. 로버트 레드포드는 정말 좋아서, 즐거워서 연기했다고, 마지막 작품에서도 너무나 행복했다고 말한다. 조용히 돌아서는 뒷모습으로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신나게 뛰어나오는 앞모습으로 기억되고 싶었던 대배우. <내일의 향해 쏴라>의 마지막 장면처럼, 당당히 정면을 응시하고 질주하면서 맞이하는 최후.
이 영화를 보고 좋아하는 일을 해야 우아할 수 있겠구나 깨달음을 얻으면서 새해를 맞았다. 당당하게 정면을 마주하면서 달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마흔이 목전인 나에게는 꼭 필요한 신년 메시지.. 젊을 때보다 더 이쁜 것 같은(왜죠?) 씨시 스페이식, 요즘 잘생겼다고 하는 배우들과는 여전히 비교도 안 되게 멋지신 로버트 레드포드를 보는 것은 감사한 일이었다. 늙어 가고 있는 게 늘 무서운데, 이런 거라면 괜찮겠다 싶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 갖춰 입어야 뭘 아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씀! 마음에 새기고 신년에는 옷을 잘 입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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