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중요했고, 모든 것이 아팠다

<로마> 보고 왔다

by 하나김

집에서 넷플릭스로 볼까, 영화관에서 볼까 고민하다가 알폰소 쿠아론의 인터뷰를 읽었다. "이상적으로는 극장에서 이 영화를 봐주길 원하지만, 현실적으로 보다 많은 사람이 이런 소규모 작품을 즐기기 위해선 넷플릭스 같은 신규 플랫폼이 맞지 않나 생각했다." 가라는 얘기잖아요!!;; 그래서 갔다.


결과적으로는 극장에 가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이 영화만큼 빛과 소리가 아름다운 영화는 만나기 어렵다. 모든 장면이 그림처럼 아름다운데, 대체로 고정돼 있는 앵글 안에서 정말 다양한 인물과 동물과 식물이 움직이면서 순식간에 그림 같은 구도를 완성해 낸다. 장면을 캡처해서 사진전을 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 영화는 <대부>, <레버넌트> 이후 처음인 것 같다.

빛과 구도가 그림이다

거의 모든 장면에서 동시에 쏟아지는 대여섯 가지의 각기 다른 소리는 방향이 앞, 뒤, 옆으로 정확하게 나뉘어 있어서 엄청난 공간감을 준다. 멕시코시티 로마의 가정집 마당에 들어가서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만큼 생생한 사운드였다. 심지어 내 옆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떠드는 것 아닌가 싶어 주위를 두리번거리기도 했다.;


영화는 의사인 아버지, 생화학 교수인 어머니, 고상한 할머니와 귀여운 네 아이로 구성된 70년대 멕시코 중상류층 가정의 이야기를 그린다. 입주 가정부인 클레오가 주인공이지만, 벌어지는 사건의 주인공은 제각기 다르다. 바람나서 아내와 아이들을 버리고 내빼는 아버지가 몰고 오는 가정의 붕괴, 70년대 멕시코의 민주화 운동과 정권의 폭력, 거기에 동원되는 가난한 청년들... 클레오는 너무도 담담하게 그 모든 사건을 보고, 듣고, 받아들인다.


알폰소 쿠아론의 기억 일부를 잘라 내서 영사기에 돌린 것 같은 영화는 그 무엇에도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아버지가 집을 나가서 무너지는 가정도, 임신한 채로 남자 친구에게 버림받는 클레오의 비극도, 군경에 동원돼 무술 교육을 받고 또래 대학생들을 죽이고 있는 가난한 청년들의 뒤틀린 삶도, 지금의 서울만큼 멀끔한 멕시코시티와 비포장도로에 판잣집이 즐비한 가난한 동네의 극단적인 대조도 똑같이 보여 줄 뿐이다. 어떤 것이 더 중요하거나 어떤 것이 더 아프지 않다. 당시의 평범한 멕시코인들이 경험한 일상처럼 모든 것이 중요하고 모든 것이 아프다. 혹은 모든 것이 별일 아니고, 모든 것이 아무렇지 않다.

남자 친구 찾으러 가는 길

소리도 마찬가지다. 모든 종류의 일상 소음이 똑같은 크기로 쏟아져 나온다. 그 속에서 인물들은 소리를 듣기도 듣지 않기도 하면서 살아 나간다. 주인공 클레오가 사라진 남자 친구를 기다리면서 앉아 있는 극장 앞에는 정말 혼이 빠질 정도로 시끄럽게 호객 행위를 하는 장사꾼 네다섯이 있고, 그 주변에는 집으로 돌아가는 관객 수십 명이 있다. 하나같이 얼마나 시끄러운지 귀가 찢어질 지경이다. 그런데도 클레오는 멍하니 계단에 앉아 있다. 마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바닷가에서 물에 빠진 아이들을 구할 때에도 그렇다. 휘몰아치는 파도가 굉음을 내고 있지만, 클레오는 바다를 쏘아보며 돌진한다. 그 장면만 보면, 클레오가 듣지 못하는 사람인 것처럼 보일 정도다.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거나 기다리거나 구해 낼 때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어떤 면에서는 환상적이기까지 한 '사실'을 이 영화는 완벽하게 구현해 낸다.


다시 보니까 진짜 너무 의사 선생님 같음..;;

누군가의 삶을 촬영하는 것처럼 찍기 위해 각본은 매일 아침에 나눠 주고, 배우들도 현장에서 이미지가 맞는 사람들로 캐스팅했다고 한다. 주인공 클레오 역을 맡은 얄리차 아파리시오도 교사 지망생이었단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인 병원 씬에 등장하는 배우들은 실제 그 병원 간호사와 의사들; 어쩐지 너무 담담하게 기계적으로 무서운 말을 읊조리더라. "사망했습니다." "이제 데려가야 돼요." "위급한 상황입니다." "하나, 둘, 셋"..


알폰소 쿠아론은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영화에 비친 시공간의 미묘한 느낌들을 눈으로 보는 것 이상으로 관객에게 온전히 체험시키는 게 이 작품의 목표였다”, “현대의 유령이 과거로 돌아가 그 당시를 관찰하는 듯한 관점을 구현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영화 속 시공간에 빠져서 유령이 되어 과거를 배회하는 스크루지;;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었는데, 이 모든 게 알폰소 쿠아론의 계략;이었어.. ㅠㅠ


장면 하나하나가 자꾸 생각난다. 다시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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