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까지 참을 수 있을까, 어디까지 참아야 하는 걸까

<기생충> 본 지 한참 지났지만

by 하나김

영화 평론가 이동진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에 대해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 낸 신랄하면서 처연한 계급 우화'라는 평과 함께 별점 4.5점을 줬다. 황당하게도 '잘난 척' 논란, 어휘력과 문해력 논란이 일면서 이 한 줄 평을 알게 됐는데, 처음 든 생각은 너무나 적확한 표현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정확히 같은 이유로 이 영화에 0.5점을 주고 싶었다.


이 영화를 본 뒤 왜인지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서 감상을 기록하기가 두려웠다. 알 수 없는 분노의 정체를 몰라 답답해하던 중에 이동진 평론가의 저 평가가 이 갑갑증을 단번에 날려 줬다.


그렇다. 사람의 삶, 지옥 같은 현실을 '명징하게' '직조해서' '우화'를 만들면 안 되는 거다. 우리는 모두 내가 경험하지 않은 삶을 단편적으로 이해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다각적인 분석은 너무나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단편적으로 이해한 것만으로 '다 이해했다'고 생각해도 좋다는 건 아니다. 적어도 내가 아는 것은 표피일 뿐이라는 사실은 알아야 한다. 잘 모르는 남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면, 최대한 현실에 가까이 다가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누군가의 삶을 명징하게, 직조하고, 우화를, 만들 수는 없는 일이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 정도는 인정하고 이야기를 시작해야 마땅하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캐릭터 대부분은 정말 우화에나 등장할 법한, 기이한 방식으로 평면적인 종이 인형들이다. (기이한데 평면적이라는 점은 신기하기는 하다.) 평면적인 인물들은 자신의 스토리를 말이나 행동으로만 보여 주지 맥락으로는 보여 주지 못한다. 잔머리 굴리는 데에 천재적이고 외모도 출중한 두 남매는 현실 세계에서 충분히 할 수 있을 법한 일 같은 일은 전혀 안 하고 산다. 그러고는 남의 집에서 난장판 벌이고 도망쳐 나와서는 자기네의 가난한 현실에 분개하고 있으니 공감이 갈 수가 없다. 유튜브에서 상자 빨리 접는 법을 보고 따라 할 정도로 요령 부리는 데에 능한 아버지는 아들, 딸을 방패막이 삼아 불량품 박스 문제를 회피하는 유의 사람인데, 박사장의 '냄새' 얘기에는 어떤 버튼이 눌린 건지 극단적인 행동을 한다. 터프하고 담대한 것처럼 보이는데 시종일관 주변적인 역할밖에는 하지 않는 엄마 캐릭터는 그렇게 많이 나왔는데도 아예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가장 심각한 건 지하 세계에 사는 남자다. 모스 부호에 열광하거나 지하 세계 위의 주인인 박사장에 대한 경외심을 품고 괴상한 방식으로 콘돔을 수집하는 이 캐릭터는 광기를 보여 준다고 해서 입체적인 인물이 될 수 없음을 증명하고 있을 뿐이다. 이정은이 연기한 '문 광' 선생님, 조여정이 연기한 연교가 등장하는 장면들만이 이 영화가 살아서 펄떡이는 순간들이었다.


그나마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들은 사라지고 아버지와 아들만 남은 결론은 허무하다. 결국 그렇게 더 깊은 지하 세계로 들어갈 운명이었고, 지하와 지상이 뒤섞이면 파국이 있을 뿐이라는 메시지와 지상과 지하는 '계단만 걸어 올라오면 되는' 거리라는 공자님 말씀 같은 메시지로 대체 어떤 울림을 주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처음부터 끝까지 과장된 이미지와 '명징'한 상징으로 점철된 영화는 영화제 수상을 노린 것처럼 느껴지기만 했다. 사회 문화적 배경이 아예 다른 글로벌 시장의 영화 엘리트들이 한국의 양극화와 계층 문제를 손쉽게 떠먹을 수 있을 만큼 아주 명확한 상징들은 생각할 여지도, 곱씹을 거리도 없는 무미의 끝이었다.


(이와 관련해서는 박우성 영화 평론가의 글이 굉장히 논리적인 설명을 해 주고 있다.)

https://news.joins.com/article/23491139


영화가 개봉하고 나서, 여기저기서 반지하 경험에 대한 고백이 많이 나왔던 것 같다. 그런 이유로 이 영화가 숨기고 싶었거나, 잊고 싶었던, 외면하고 싶었던 현실을 마주하게 만든 역시 걸작이라는 평가들도 몇 차례 접했던 것 같다. 나 역시 이 영화를 보고 잊고 있었던, 결코 짧지 않았던 반지하 시절에 대한 생생한 기억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기는 했다.


그러나 내가 반지하 얘기를 쓰고 싶어 하는 이유는, 지금은 반지하에 살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쓰지 않기로 했다. J.D. 밴스가 엄마의 약물 중독까지 솔직하게 기록한 <힐빌리의 노래>를 펴낼 수 있었던 이유도, 예일대 로스쿨 나와 행복한 가정 꾸린 실리콘밸리의 변호사 겸 투자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한, 반지하로 상징되는 시궁창 같은 삶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그 누구도 그렇게 솔직하게 자기 얘기를 할 수 없다. 그 옛날, 사는 곳을 알리기 싫어서 큰길에서 친구와 헤어지고 뛰어들어 왔던 나처럼.


예술은 필연적으로 주제를 대상화하고 타자화한다. 자기가 경험한 것만 작품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는 말도 안 될 것이다. 그러나 한 걸음 물러나서 주제를 관조할 수는 있다.(<나, 다니엘 블레이크>나 <로마> 같은 작품들이 있지 않은가.) 어떤 삶을 극단적으로 단순화하는 일은 누군가에게 의도하지 않은 상처를 줄 수도 있다. 예술의 타자화를 어디까지 참아 줘야 하는 걸까? 나는 어디까지 참을 수 있는 걸까? 영화를 본 지 몇 달이 지난 지금, 약간의 거리를 두고 다시 생각을 해 봐도 나는 이 영화 <기생충>을 참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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