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캡틴 마블> 본 지 한참 지났지만
영화를 본 지 몇 달이 지났는데도, 생생히 기억난다. 극장의 의자에 앉아 있는데, 온몸이 터져 나갈 것 같아서 손으로 팔걸이를 부여잡고 있었던 순간. 뒷자리에 앉은 여자분들은 훌쩍이고 있었다. <캡틴 마블>이 말 그대로 천하무적인 괴력으로 악당들을 물리치는 장면에서였다.
누군가는 오버한다고, 영화 외적인 '사상'이 영향을 준 거라고 폄하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느꼈다. '임파워먼트'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격투기 같은 건 배워 본 적도 없고, 싸우기보다는 피하는 쪽이 편한 소심한 나도 지하철 같은 데서 추태 부리는 인간들이나 되도 않은 걸로 시비 거는 인간들을 주먹으로(정말 주먹질) 패 버리고 싶은, 패 버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느껴졌다. 호전성과는 조금 다르다. 태어나서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것, '나도 이길 수 있다'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히어로 영화를 좋아했다. 영화를 좋아하는 오빠 덕에 흔히 '소녀'들이 안 볼 것 같은 영화도 일찌감치 보면서 자랐다. 배트맨과 스파이더맨처럼 되고 싶다는 꿈도 꿔 봤고 희생하는 삶이 멋지다는 생각도 했다. 히어로 영화를 충분히 즐기고 있었고, 마음 깊이 좋아하고 있었다.
고, 생각했다.
<캡틴 마블>을 보고 알았다. 나는 그 무엇도 보지 못했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충격과 공포) 이 영화를 보고 내가 느낀 희열, 짜릿함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다. 내 몸이 하늘로 솟구치는 것 같았고, 온몸에서 힘이,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이 나이에 말입니다..) 그건 확실히 공감과 동일시 때문이었다. 어떤 면에서든 나와 같은 조건의, 나와 비슷한 환경에서 분투해 온 사람의 이야기여서 완전히 동화될 수 있었다.
하.. 너희들은 지금까지 이런 걸 느끼면서 자랐구나? 그랬구나. 배트맨을 보면서, 스파이더맨을 보면서 심장이 터지고 손발이 저릿했겠구나... 애정과 동경과 몰입의 최대치 자체가 달랐던 거다. <블랙 팬서>를 본 흑인 관객들이 "아니 지금까지 백인들은 이런 걸 봤던 거야?!!" 그랬다는데.. 그 말이 뭔지 너무 이해가 됐다.
'힘을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 '너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아가씨, 오늘 무슨 안 좋은 일 있나? 표정이 왜 그래.' 이런 말을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아예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수시로 듣고 살았던 수많은 여성들은 모든 장면에서 주인공 댄버스에게 이입될 수밖에 없다. 과거의 미국으로 돌아온 댄버스가 오토바이 옆에 기대 서 있을 때, 지나가던 멍청한 놈이 '안 좋은 일 있냐?'며 표정 갖고 타박할 때는 거의 모든 여성 관객들이 웃음을 터뜨렸는데, 나를 포함해 대부분이 실제로 경험한 일이어서 그렇다. 진짜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이 표정 더럽다고 뭐라고 하는 경우가 중학생 때부터 있었다... (내가 너를 위해서 웃어 줘야 하는 거냐?)
브리 라슨이 연기한 댄버스는 여성 캐릭터의 신기원을 연 완벽한 영웅이다. 그는 조금도 의식하지 않고, 여성주의적인 아이디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이, 아주아주 당연하게 자신의 힘과 능력을 믿는다. 과거로 돌아가 만난 옛 동료와 그가 혼자 키우고 있는 딸을 만나 대화할 때는 압권이다. 닉 퓨리가 옆에 앉아 있는데, 댄버스가 소녀에게 말한다. '이 사람은 무슨 얘긴지 전혀 몰라.'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음)
영화를 보기 전엔 브리 라슨이 마음에 안 들었다. SNS에서 보인 철없는 행동들이 사상 최초의 여성만을 위한 히어로 캐릭터에 괜한 잡음을 일으킬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아니 좀 괜찮은 사람이 역할을 맡으면 오해도 안 사고 좀 좋아.. 뭐 이런 생각이었는데, 이게 얼마나 멍청한 생각이었는지는 영화를 보자마자 깨달았다. 오해 안 사려 하고 괜찮은 사람이 되려고 하고 조용히 있으려고 하는 관념 자체가 캡틴 마블이 깨 부숴야 하는 대상인데! 아무런 의도 없이 순수하게 강력한 힘을 즐기면서 멋지게 싸워 나가는 인물로는 브리 라슨만한 적임이 없다.
캡틴 마블의 말도 안 되는 무적의 힘이 개연성도 없고 납득도 안 된다는 비평을 봤다. 우리가 아는 다른 (남성) 캐릭터들처럼 역경과 고뇌 속에서 힘을 발견하거나 만들어 내는 스토리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남성 히어로들에게 '결핍'이 캐릭터가 되는 것처럼, 여성 히어로에게는 '완전 무결함' 자체가 캐릭터다. 여자라는 것만으로도 이미 너무 많은 역경과 고뇌 속에 살고 있는데 또 무슨 결핍이 필요한가. 오히려 그 무엇보다도 강한, 절대적인 힘을 만끽하면서 '유후!!'를 외칠 수 있는 캐릭터야말로 독창적이고 새롭다. 보통의 여자라면 '아니 내게 왜 이런 힘이.. 대체 이걸 어쩌라는 말씀이신가요.' 고뇌하겠지만, 우리의 댄버스는 그러지 않는다. 되네? 그럼 하지, 뭐!
이 영화를 보고 전 세계의 수많은 소녀들을 떠올리니 코 끝이 찡해졌다. 이런 영화를 보고 자라는 소녀들은 얼마나 강할 것인가. 얼마나 큰 세계, 얼마나 더 강력한 힘을 꿈꿀 것인가. 그리고 얼마나 자유롭게 그 힘을 즐기며 살아갈 것인가. 설레고 기대된다. 나는 영화라는 분야가, 장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을 이 영화 <캡틴 마블>이 해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