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버나움〉보고 왔다
영화를 보는 내내, 모로 앉아서 화면을 노려 보고 있었다. 눈물은 단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당장 스크린을 찢어 버리고 싶었다. 영화의 주인공인 어린이가 가여워서, 말도 안 되는 어른들의 행태와 그보다 더한 사회의 시스템에 분개해서 그런 것이 전혀 아니었다. 그냥 온몸으로 이 영화가 혐오스러웠고, 싫었다. 왜 그런지 당장 설명이 안 되는 분노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이 분노의 뿌리를 발견했다. 나는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가버나움〉은 레바논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아동 학대의 실태를 보여 주는 영화다. 영화는 12살쯤 된 소년 자인이 '나를 낳았다'는 이유로 부모를 고소하고 더 이상 애를 낳지 못하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자인은 아이를 물건이나 노동력쯤으로 생각하는 부모 밑에서 학대당하며 자라고 있다. 학교는 당연히 못 가고 여동생 사하르를 좋아하는 중년 남자 아사드가 운영하는 슈퍼에서 가스통 배달, 식재료 배달 일을 하고 남은 음식을 받아가면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다. 집인지 돼지우리인지 알 수 없는 공간에서 부모가 하는 일이라곤 애 만드는 일뿐. 사하르가 아사드의 신부로 팔려 가고 분노해 집을 떠난 자인은 가난하지만 아들 요나스를 잘 키워 보려 애쓰는 케냐 출신 불법 체류자 라힐을 만난다. 라힐이 잡혀 가면서 갓난 요나스를 떠맡게 된 자인. 외국으로 이민 가고 싶지만 출생 신고도 안 한 부모님 때문에 나가지도 못한다.
분명히 짜임새 있는 영화이고 보는 내내 몰입하게 되는 스토리다. 문제는 이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모두 실제로 레바논에서 학대를 당하고 있는 어린이라는 점이다. 본명 그대로 영화에 등장하는 자인부터 갓난쟁이 요나스, 11살에 신부로 팔려 가는 사하르, 길거리에서 행상하는 시리아 난민 소녀 메이소운까지. 다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는 아이들이다.
이 아이들에게 너희들 평소에 살던 대로 '연기'를 하라고 하는 것이 대체 어떤 의미였을까. 나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가 없다. 너무나 어른스러운 자인의 눈빛과 몸짓은 연기일까, 실제일까.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재현하라는 요구를 너무나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는 소년, 소녀가 과연 '감동의 연기'를 한 '배우'인 걸까. 이 아이들은 전 세계에 자신의 지옥 같은 삶이 생생하게 전시될 거라는 사실을 이해나 했을까. 나에게 이건 영화를 보는 게 아니라 학대의 현장을 보는 고통의 대리 체험이었다. 이게 영화인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까지 들었다.
역설적으로, 실제 학대의 당사자인 미성년 어린이들이 고통을 재현하는 내용의 영화를 찍을 수 있다는 게, 레바논의 끔찍한 현실을 대변하는 것 같기도 하다. 대체 멀쩡한 시스템을 갖춘 국가 어디에서, 어린이들에게 너의 고통을 그대로 연기해 보라고 요구하겠느냐 말이다.
영화 말미에 '가버나움 재단'을 만들어 학대당하는 어린이들을 돕고 있다며 자인과 가족을 노르웨이로 보냈고 요나스는 케냐로 돌아갔고 메이소운과 사하르도 도움을 받았다는 자막이 나오는 것만으로 '좋은 작품' 만들어 '좋은 일'했다고 말할 수가 없다. 불행을 재현한 대가로 노르웨이 보내 줬다는 거냐는 배배 꼬인 생각마저 들었다. 내가 저 어린이들의 고통을 관람하기 위해 지불한 돈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을 씻어 주는 역할 정도는 했겠다.
영화에 자인을 변호하는 변호사로 출연하기도 한 감독 나딘 라바키는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자인은 학교에도 못 다니고 거리에서 물건을 팔던 아이였어요.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했죠. 연기를 배울 수 있는 상황이 아녔어요. 하지만 얼마나 많은 것을 보고 또 겪었는지 그 눈동자가 말해주고 있었어요. 학대가 무엇인지, 배고픔이 무엇인지 하나도 설명할 필요가 없었죠. 실제로 촬영에 들어가자 자인은 카메라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그냥 자기 자신을 연기했고요."
'무자비한 현실을 연기하는 아이들이 힘들진 않았을지'를 묻는 질문엔 이렇게 답한다.
"전혀요. 아이들에겐 현실이 트라우마죠. 촬영장은 오히려 성소(聖所)였는 걸요. 사랑으로 아이들을 감싸 줬죠. 불법 이민자였던 요나스의 부모가 경찰에게 붙잡히는 바람에 저희 제작진이 손발 걷어붙이고 요나스를 돌봤어요."
이 인터뷰를 보고 더 소름이 끼쳤다. 선택지가 없는 지옥 같은 삶을 살았던 아이들에게 출연이라는 선택이 과연 긍정적 자의만으로 이뤄진 것이었을까. 그런 의문을 던지는 것이 어른의 역할 아닌가. 나는 사랑으로 감싸 주는 너희들의 변호사니까 행복했던 거라는 논리는 너무나 일방적이다.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받았을 때의 레드카펫 사진에서 밝게 웃고 있는 감독의 옆에 선 자인은 영화 속과 꼭 같은 서늘하게 슬프고 차분한, 그러면서 초점이 없는 눈을 하고 있다. 조금도 웃지 않는 소년의 눈, 코, 입, 얼굴... 어디를 보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내리깐 시선...
영화가 끝나고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이끌고 계단을 내려오는데, 객석 의자 아래에 나뒹굴고 있는 팝콘과 맥주가 보였다. 대체 우리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