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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나김 May 28. 2021

공간에서 살아 숨 쉬는 메시지

피크닉 전시 ‘정원 만들기’

화분은 받았을 때 가장 곤란한 선물이다. 물을 너무 많이 줘서, 너무 안 줘서 여러 개의 화분 속 식물을 떠나보낸 경험 탓에 화분을 받으면 감사한 마음 이전에 미안하고 죄스러운 기분부터 든다. 또 죽일까 봐..;; 그런 내가 집에서 식물을 키워 보고 싶다, 텃밭을 일궈 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된 계기가 있었다. 각성의 순간은 의외로 전시 관람이었다. 피크닉의 전시 ‘정원 만들기’.


처음 만나게 되는 1층의 설치 구조물은 식물에 대한 생각 자체를 흔들어 놓는다. 양파, 당근, 배추 같은 일상의 채소들이 사람 크기만큼 거대해져서 눈부신 빛을 뿜어 내면서 부풀어 오르고 있다. 공간의 모든 벽을 둘러싼 왜곡 거울에 기괴하게 반사되면서. 평소에 먹는 것, 맛있는 것쯤으로만 여겼던 채소들이 나를 잡아먹을 것처럼 무섭게 생명력을 드러내고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것들에는 ‘살아 있는 것’이라는 의미 부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도시 환경에서 식물이 살아 있다는 걸 일단 제대로 느끼고 출발.

다음 층에서 작은 실외 정원을 지나면 흙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생명의 움직임을 확대한 듯한 비디오 작품이 있다. 흙더미가 바닥에 쌓여 있어서 ‘자료 영상 상영’ 같지 않은 느낌.


헤르만 헤세 같은 명사들의 다른 직업이 정원가였다는 사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정원가가 여성 조경가인 정영선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 준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던 다음 층에서는 페이퍼, 영상 자료들을 볼 수 있다. 서울식물원, 서울아산병원, 선유도공원 등 서울에서 한 번쯤은 가봤을 아름다운 정원을 설계한 정영선 조경가의 설계도면과 시를 필사한 노트, 인터뷰 비디오는 따로 메모를 해두고 싶을 정도로 좋았다. 시를 좋아해서 애송시를 모아 따로 책을 만들어 선물했을 정도였다는데,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 시를 사랑하는 사랑하고, 그 마음으로 공사 현장에서 꽃과 풀과 나무를 심어 하늘과 땅을 새롭게 디자인하는 일을 하는 건 너무 자연스러운 일 같았다. 그 옛날 토목 현장에서 여성이 조경을 설계한다는 것이 어떤 일이었을지, 어떤 의미였을지 상상만으로도 아득해져서 무거워진 마음으로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까지 표시해 둬서 거의 쇠라 점묘 화급으로 빽빽한 설계도 무리 앞에 섰을 때는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특히 서울아산병원 조경 설계에 대해 인터뷰하면서 우리나라 병원 중에 환자가, 보호자가 숨어서 눈물 쏟고 마음 추스를 공간이 있는 곳이 있느냐, 의사와 간호사가 산책하면서 몸과 마음을 치유할 공간을 갖춘 데가 있느냐고 말씀하신 것은 일, 사업, 직업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결국 모든 일은 사용자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하는구나.


매번 식물을 죽이고 화분에는 스티커를 붙여 배출하는 나를 반성하게 한 도심 속 정원가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전시도 새로웠다. 좁은 원룸이나 아파트에서 엄청나게 많은 식물을 건강하게 키우면서 스스로도 건강해진 사람들, 작은 서재의 책상을 둘러싼 아름다운 식물들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조금은 들었다.; (하지만 난 아마 안 될 거야…)


사진으로 공유가 많이 된 옥상 정원은 남산이 보이는 골목에 폭 파묻힌 피크닉의 위치 자체가 작품이었던 공간. 남산의 울창한 숲이 올려다 보이고, 피크닉 앞집, 옆집(가정집)의 소담한 옥상 정원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서 정원은 생각지 않게 우리 삶 속에 이미 들어와 있구나 깨닫게 된다.(우리 집에만 정원 없어;;)

정영선 조경가가 설계한 처마가 있는 얕은 마루에 앉아 한국의 야생 식물들을 보는 것으로 전시는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작은 서프라이즈 마무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옥상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면 관람객에게 자작나무 방향제를 선물로 준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전시와 일맥상통하면서도 단정하고 예쁜 선물.


나오면서 남편과 이런 대화를 나눴다. “우리도 정원 가꾸고 싶다. 아기하고 풀 심고 싶다.”

정영선 조경가가 이 전시를 통해 주고 싶은 메시지였다던 “나도 정원을 갖고 싶다”는 마음을 이렇게 완전하게 탑재하고 나오다니.


일방적인 메시지를 수동적으로 접할 때가 많은 전시에서 이렇게 능동적으로 생각을 바꾸게 된 것은 역시 온몸으로 체험하는 전시의 촘촘한 설계의 결과일 것이다.


내가 간 날은 비가 쏟아졌다 갠 날이라, 촉촉이 젖은 식물들을 보는 재미가 있었다. 10월까지 전시한다는데, 한여름의 땡볕 아래, 서늘한 가을의 공기 속, 붉게 물든 남산을 뒤로한 피크닉의 정원은 또 어떨지 너무 궁금해서 앞으로 세 번 정도는 더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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