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기라서 다른 건 아니고
나는 결혼 후 10년 가까이 아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설명을 거의 매일 해야 했다. 우리나라에서 아기를 안 낳고 산다는 건, 아기 안 낳겠다는 선언을 수시로, 주기적으로 외부에 해야 한다는 의미다. 보기에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 보이거나, 기혼임이 알려진 여성이라면 초면이든 구면이든 할 것 없이, 아기 있어요? 아기 안 낳아요? 왜요?로 이어지는 질문을 받으면 산다.
그럴 때마다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설득하는 분들이 꼭 있었다. “아기 싫어하는 사람도 자기 애는 무조건 예쁘다니까요”라면서.
식당에 들어갔다가 아기가 있는 테이블 근처에만 자리가 있다면 그냥 돌아 나와 버렸다. 버스나 전철에서 아기가 옆으로 오면 불편한 수준을 넘어 약간 무섭기까지 했었다. 침을 흘리면서 뒤뚱뒤뚱 나를 향해 다가오는 아기만큼 당황스러운 것도 없었다. 어떤 아기를 싫어한다는 게 아니라 모든 아기가 공유하고 있는 특성이 불편했다.
그랬던 나의 오늘을 봤다면, 나를 설득하려던 그분은 역시 내가 옳았다며 뿌듯해하실 것 같다. 낳아 보니 정말 예쁘긴 하다. 아기를 떠올리면 심장이 간질간질하고, 아기의 이름을 혀 짧은 소리로 불러대는 내 목소리와 (아마도) 엄마 엄마 하는 아기의 옹알이가 귓가에 울려 퍼진다. 아기 사진을 들여다볼 때는 마음이 든든해지고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다.
그런데 어쩌지, 그분의 진단은 틀렸다. 아기를 싫어하던 사람이 애 낳더니 자기 애라고 다르게 대하는 건 아닌 것 같다. 내 생각이 바뀌게 되는 과정은 오히려 정반대였다. 우리 아기라 역시 다르다고 생각되기보다는 모든 아기가 우리 아기 같을 거라 생각하게 된다. 우리 아기를 알기 이전에 아기들의 특성을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된다. 세상에 이렇게 맑고 깨끗한 무언가가 있을까 싶을 만큼 하얗고 까만 눈, 보송보송하다 못해 쫄깃쫄깃;;한 두 볼, 어디서도 들어본 적 없는 온 마음이 담긴 꺄르르 웃음 소리.
생각해 보면, 나는 단 한 번도 아기와 생활해 본 적이 없었다. 아기들이 어떤지 전혀 몰랐다. 우리 아기와의 매일이 나에게는 아기와의 첫 경험인 셈이다. 침을 흘리지만 냄새는 나지 않는다는 것(정말 너무너무 신기함.. 젊어서 그렇겠죠), 물건을 때려 떨어뜨리는 건 어색한 손놀림 탓이지 정제되지 않은 폭력성 같은 게 아니라는 것, 주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봐주지 않으면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낸다는 것(그래서 이전의 나 같은 어른이 옆에 있으면 아이들이 더 불안해하고 기분 상해하고 큰 소리를 낸다는 이치)도 몰랐다. 그냥 아기들은 원래 시끄럽고 불편한 존재들이고, 나는 내 기분이나 반응을 숨기기 어려우니 피하는 게 상책이다 그랬다. 그렇게 아기들과 만날 일은 점점 더 사라지고, 아기를 이해할 수 없게 되고, 아기는 더 두려워졌다.
아기를 낳고 무슨 포털의 문이 열리듯이 아기의 세계가 내 삶으로 들어왔다. 아기라는 존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니 이제는 내가 오가는 모든 곳에서 아기들이 나타난다. 자주 다니는 거리에서 안 보였던 아이들이 요즘엔 눈에 쏙 들어온다. 영화를 봐도, 그림을 봐도, 책을 읽어도 갑자기 아이들이 너무 많이 등장하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된다.
우리 아기를 만나고 더 많은 아기들과 만나게 됐다. 아이들의 세계가 보이고 아이들이 살기에 얼마나 나쁜 세계인지도 보인다(우리 동네에 좋은 놀이터 왜 없어...). 내 아기만 특별한 세계가 아니라 모든 아기가 특별한 세계에 살 수 있게 됐다.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이면 이전의 세계까지 전부 달라지는 것처럼, 우리 아기는 내 사고방식의 예외가 아니라, 내 모든 사고의 출발점이 되었다.
보지 않으면, 만나지 않으면 영원히 이해할 수 없고, 사랑할 수 없다. 아기뿐 아닐 거다. 불편하고 싫은 무언가가 있다면 생각해 보라. 곁에 두고 함께한, 잘 아는 대상인지. 아마 아닐 것이다. 좋은 점을 볼 기회가 없고, 나쁜 점은 왜 그런지 이해할 방법이 없는 타인, 집단, 환경은 더 쉽게 비난하게 된다.
노키즈존을 반대하는 이유는 물론 내가 아기 엄마여서, 모든 종류의 차별에 반대해서다. 하지만 아기를 불편해하고 싫어하는 사람들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불편하고 싫은 감정만큼 불편하고 싫은 것도 없지 않은가. 그 불편과 불쾌를 해소할 방법은 함께하는 것이고, 그래서 아는 것이다. 아기를 옆에 두지 않으면, 아기와 함께하지 않으면 영원히 아기를 알 수 없다. 아기를 알면, 아기에 대한 불편이 사라질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