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원래 거절을 못하는 사람이었다

[김한별 아나운서 육아 휴직 일기 #43]

by 스타킴 starkim

나는 꽤나 '착한' 축에 속했던 사람이었다. 남들과의 분쟁을 싫어했다. '좋게 좋게' 해결되기를 바라는 평화주의자. 아내의 표현으로 하자면 '너도 옳고, 너도 옳다'는 소위 '황희 정승식 사고'의 소유자. 누군가와 크게 싸워본 적이 없었다. '싫은 소리'를 하기 싫어했으니까. 물론 듣는 것도 싫어했다. 무엇보다 불편한 상황이 싫었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불편한 상황을 '피한' 것이 맞다. 내가 견디기 싫어서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것이다. 분쟁의 순간을 만들지 않으니, 다시 표현하면 분쟁의 순간에는 내가 없으니 겉으로 보기에 나는 늘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상황 속에 있었다. 어떤 상황도 좋은 쪽으로 해석하려고 노력했다. 일종의 강박이었다.
늘 '착한' 사람이고 싶은 욕심.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 의지. 불편한 상황에서는 입을 닫았다. 지나가길 바라는 것이다. 나를 피해가길 바랐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나는 '착한' 사람이어야만 했다.

핵심은 '거절'이었다. 나는 거절을 못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내 거절로 인해 서운해 할 누군가의 모습을 보는 게 싫었다. 내가 거절하는 순간 멈칫하는 상대방의 모습, 난처해하는 상대방의 표정, 어쩔 줄 몰라하는 상대방의 반응이 싫었다. 굳은 얼굴로 둘 사이에 흐르는 침묵이 무엇보다 싫었다. 그 순간을 겪느니 차라리 '내가 조금 손해보고 말지'라는 생각이었다. 상대방이 서운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계속되다 보니 내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상대에게 전달되는 경우가 많았다.
'차라리 그때 제대로 거절을 할 걸.'
나중에 후회하는 경우도 많았다. 남들에게는 '착한' 사람이었지만 나에게는, 내 감정에는 결코 착하지 못했다.
'착하다'라는 표현은 우리나라와 일본에만 있다는 글을 봤다. 어원으로 따져봤을 때 우리의 '착하다'와 가장 가까운 영어 단어는 honesty. 내 감정에 가장 솔직한 것. 그게 '착하다'와 가장 가깝다는 얘기였다. 원래는 ‘솔직함’을 말하지만, 우리가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착함’은 조금 다른 의미일 때가 많다. 사회의 시선에, 누군가가 정해놓은 기준과 틀에 나를 맞추며 남들에게 ‘착한’ 사람으로 인정받기를 원하는 심리. 나는 남들의 기준에서는 참 ‘착한’ 사람이었지만, 나에게는, 내 감정에는 결코 솔직하지 못했다. 나는 나에게 착하지 못했다.

난 애주가였다. 술자리를 좋아했었다. 사람들과 술자리에서 나누는 얘기가 좋았다. 몽롱하면서도 뿌옇게 기억되는 술자리 자체의 정겨움이 좋았다. 처음 보는 사람과도 친구가 될 수 있는, 친했던 사람과도 더 가까워질 것만 같은 기분이 좋았다. 외롭지 않았다. 술자리에 특화된 사람이었다. 적당히 밝았고, 적당히 흥도 있었다. 술을 꽤나 잘 먹는 편이었다. 일단 먹는 양 자체가 꽤나 많았다. '외롭지 않다'는 이 느낌이 사라지면 안 되니까. 그 느낌을 이어가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그래도 꾸준히 운동을 했었기 때문에 체력은 좋았다. 내가 애주가일 수 있었던 것은 운동, 체력 덕분이었다.
작년 겨울 교통사고가 나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술을 먹지 못하게 됐다. 잠시 쉬면서 나에 대해 생각해봤다. 생각해보니 난 몸이 술을 잘 받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사실 조금만 먹어도 취한 느낌이 들었다. 그 뒤로는 오기로, 체력으로 '버티는' 거였다. 체력은 자신 있었으니까. 술 자체를 좋아한 적도 없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술자리 분위기'였다. 난 거절을 잘 못하는 거였다. 내가 거절하면 분위기 깰까 봐 술을 마시는 거였다. 버티기는 했지만 다음날은 힘들었다. 티를 내지 않고 버텼던 거였다. 다음날 힘들 걸 알면서도 거절하지 못하고 버텼던 거였다. 그때는 내 몸보다 그 분위기가 더 중요했나 보다. 다음날 기억도 못 할 그 분위기가.

IMG_2694.JPG?type=w1



나는 거절을 못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내 거절로 인해 서운해 할 누군가의 모습을 보는 게 싫었다.


윤슬이가 태어나고 자연스럽게 거절을 하게 됐다. 윤슬이와 둘이 있는 순간 문득, 술에 취해 윤슬이를 돌보지 못할 경우를 떠올리게 됐다. 내가 아니면 목도 제대로 가눌 수 없는 이 아이를, 나만을 바라보며 온전히 의지하는 아이를 방치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아찔했다. 소름 끼치게 무서웠다. 조금이라도 취해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란 게 참 신기하다. 그렇게 생각이 드니 몸도 술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맥주 한 모금에도 취한 느낌이 든다. 정신을 더 바짝 차리게 된다.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는 순간.
술자리에서도 내가 정한 기준 이상이면 자연스럽게 거절하게 됐다. 분위기가 깨질 수도 있지만 사정을 얘기했다. 분위기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신기한 건 상대도 인정하고 이해해주는 거였다. 분위기는 깨지지 않았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를, 내 상황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기꺼이 인정해줬다. 말하면 되는 거였다.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는 이유를.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상대방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기꺼이 인정해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쩌면 그동안 난 거절을 못 한 게 아니라 이유를 말하지 못했던 것일 수도 있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내 감정에 솔직하게, 그 사람에게 이유를 말하는 것. 그건 어쩌면 거절이 아닌 진짜 '배려'일 수도 있겠다.
윤슬이를 통해 오늘도 하나하나 배워간다. 윤슬이 덕분에 아빠도 자라고 있다.


IMG_2695.JPG?type=w1



어쩌면 그동안 난 거절을 못 한 게 아니라
이유를 말하지 못했던 것일 수도 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퇴근 후 다시 출근하는 아내에게 안정감을 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