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픽션
정희가 카페라테 한 모금을 홀짝 마시고는 기대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손이며 눈썹까지 들썩거리는 모습이 내가 걱정하는 그 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안도하며 대답했다.
“어떤 것에?”
나는 대충 어림짐작을 하면서도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자신이 관심 있는 것을 말할 때마다 그의 눈빛은 바다의 윤슬을 바라볼 때처럼 감탄을 불러 왔기에.
“절대 잊지 못할 기념일을 만들자. 지금까지 제대로 못 보낸 기념일들을 전부 상쇄하고도 남을 그런 거 말이야.”
“예를 들면?”
“괴상한 음식 만들기.”
그리고 그는 내 손을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벽 보고 밥 먹기.”
“그건 너무 슬프다.”
그의 말에 나는 동의했다. 그래서 다른 대안을 내놓았다.
“누가 더 빨리 편지 쓰는지 대결하기.”
“하루 동안 왼손으로 생활하기.”
“자기 전에 옆에서 영상 통화하기.”
“방귀 뀌면 모른 척해 주기.”
“받고 하나 더. 본인이 했다고 감싸 주기.”
그렇게 이번 기념일에 해야 할 목록이 정해졌다. 그러니 하루빨리 그의 집에 가야 했다. 한시도 지체할 틈이 없었다.
시간은 고장 난 태엽처럼 빠르게 흘러갔다. 그동안 난 운전석 오른쪽 상단 백미러에 비친 남자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애써 자는 건지 애써 참는 건지 헷갈리는 얼굴이었다, 미간이 불규칙적으로 찡그러지는 모습에 깨어 있다는 것만 인지할 수 있는. 눈만 떴을 뿐이지 나 또한 저런 표정이지 않을까. 차는 경적을 피해 갓길로 대피한 상태였지만 예비 차는 금요일 저녁 교통 정체로 아직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버스 안은 여전히 혼란했다.
나만큼이나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한지 정희에게서 연달아 문자가 도착했다.
[어디쯤이야?]
[전화는 왜 안 받아?]
나는 그 문자에 전화를 받기 힘들다는 말만을 남긴 채 핸드폰을 뒤집었다. 버스에 타기 전만 해도 조급한 마음뿐이었는데, 이제는 알게 모르게 화가 났다. 어느덧 마음속에서 열기가 잔잔히 끓어오르고 있었다. 씩씩대고 있을 무렵 내 옆자리 여성은 버스에서 내리겠다며 문을 열어 달라 했다. 불퉁한 얼굴로 버스에서 내린 여성은 김이 낀 창문 너머 어두운 풍경 속에서도 아주 잘 보였다. 유유히 좁다란 흙길을 걸어가는 모습이 버스 안에서보다 훨씬 활기찼다. 그 외에도 몇 명이 버스에서 내렸고, 시간이 아홉 시를 넘어갈 즈음 남은 사람은 나와 아기를 달래던 부부, 그리고 백미러로 보이던 눈을 감은 남자뿐이었다.
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초췌했고 도로는 여전히 시끄러웠으며 버스 안은 고요한 숨소리만이 맴돌았다. 두 시간 전과 너무도 상반되는 분위기에 나는 이곳에 남은 사람들은 갈 곳 없는 이들이 아닐까 생각했다. 택시를 타고 갈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를 불러 원하는 목적지에 갈 수도 있을 텐데 굳이 왜 남아 있는 걸까. 실은 그건 나에게 해당되는 말이기도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난 이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기념일을 함께 안 보내는 편이 좋지 않을까 고민했다. 잊지 못할 기념일을 보내고 나면 우리는 달라질까? 우리는 전보다 더 나은 연인이 될 수 있을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럼에도 달라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기다려 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이제 야간 특급 버스 운행을 시작합니다. 먼저 저와 눈을 마주친 여성분부터 원하는 시간대로 모셔다드리죠.”
하지만 귓가에 믿기지 않는 말이 들려왔을 때, 나는 생각을 고쳐먹어야 한다는 것을 어림짐작했다. 그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누군가 준다면 어떨까? 그건 첫 번째 기념일일까, 두 시간 전에 도착했어야 할 오늘의 기념일일까. 나는 장고 끝에 결정을 내렸다.
버스 기사는 내 말을 듣고는 핸들을 오른쪽으로 거칠게 돌렸다. 버스는 어두컴컴한 저녁 하늘을 향해 붕 하고 힘차게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