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의 페르소나 (1)

미니픽션

by 김항

1. 민아


오전 열한 시, 카페에서 일하는 민아는 조금 전 이상한 여자에게 주문을 받았다. 여자의 이름은 한수린. 주문을 마친 후 낡은 카페 명함에 도장을 찍어 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민아는 도장 자국 밑에 꼬부랑 글씨로 쓰인 이름에 자연스레 눈길이 갔다.


지금 수린은 빛이 가장 환히 비치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마치 광합성을 하는 듯했다. 구부러진 허리, 회생시킬 수 없는 거북목, 몇 달간 다듬은 적이 없는 듯한 푸석푸석한 단발머리, 눈을 감았지만 떨리는 눈가. 울음을 삼키고 있는 사람 같기도 했고 명상하는 사람 같기도 했지만 카페의 유일한 손님이었으므로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민아만이 여자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민아는 조금 전 상황을 복기하며 역시 뭔가 사연이 있는 사람이다, 라는 결론을 내렸다.


수린이 처음 카페에 들어섰을 때, 민아는 딱히 수린을 주목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한 카페에서만 십삼 년 일한 베테랑 직원답게 그저 주문 메뉴를 듣고 주문 음료를 만들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컴플레인이 걸릴 수 있으므로 언제나 그렇듯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장착했다. 그렇게 입꼬리를 올리며 주문하시겠냐고 말을 꺼냈는데, 돌아온 대답이 영 찝찝했다.


“아니요.”

“주문을…… 안 하시나요?”

“그렇지 않아요.”

“그럼…….”

“아니요.”


말을 잘못 듣진 않았다. 일말의 뭉개짐도 없이 또박또박하게 귀에 박혔다. 이때부터 민아는 서늘함을 느꼈다. 새해부터는 새사람이 되고자 다짐했는데 며칠이나 지났다고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신이시여. 그럼에도 민아는 프로다운 면모를 뽐내며 추운 날씨에 맞는 따뜻한 음료 여러 개를 소개했다. 사근사근한 목소리와 함께. 수린은 집중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초점이 나간 눈빛, 안절부절못하는 몸짓. 한 귀로 흘리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민아는 생각했다. 주문하게 만들려는 자와 주문하지 않는 자의 팽팽한 신경전이 이어지고, 겨우 몇 분 만에 사람에게 질릴 수 있다는 걸 둘은 서로를 겪으며 절감했다.


끝내 페퍼민트차 두 잔이라는 말이 귀에 들리자 민아는 회심의 미소를 짓다 금세 정색했다. 꾸역꾸역 받아 낸 주문을 좋아할 이유가 없으면서도 좋아하는 게 이상하게 자존심이 상했다. 완성된 음료를 테이블 위에 놓으며 맛있게 드시라는 멘트를 날릴 때도 언짢음이 눈썹에 남았다. 계산대로 돌아와 수린을 유심히 지켜보았으나 눈이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문득 까먹었던 재고 정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 후로 일에 몰두한 민아는 수린이 앉은 자리에 더 이상 눈길을 주지 않았다. 집에 돌아가 가족들에게 오늘의 이상한 손님 뒷말을 할 때 몇 번 거론되는 정도의 미지근한 운명이겠지, 하며 그때의 민아는 다소 안일하게 생각했다.


2. 수린


수린은 오래전부터 자기 자신이 싫었다. 이 생각을 만들어 낸 상처나 환경이 분명 있겠지라고 추측할 뿐, 수린은 머릿속에서 생각이 생각을 키우도록 내버려두었다. 스스로조차 진심을 알기가 겁났다. 속을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다. 하진이 자신의 민낯을 알면 떠날 게 확실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까지 않으면 아무도 몰라. 수린은 종종 이렇게 중얼거리곤 했다. 그러나 며칠 전 수린은 단 한 번의 실수로 하진에게 자신의 민낯을 들켜 버렸다. 수린은 다시금 떨리는 눈을 감았다. 하진이 이 카페에 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일 년 전, 대학교 2학년생이던 수린은 ‘스고이’라는 일본어 동아리에서 하진을 처음 보았다. ‘어정쩡한 일본어 실력을 가진 사람들만 오세요!’라는 모호하고 열정 없어 보이는 홍보 문구 때문인지 동아리 가입자는 별로 없었다. 그러나 어쩌다 보니 하진은 아는 선배와 술 먹다 취해 반강제 가입, 수린은 ‘어정쩡한’이라는 단어가 자신을 지칭하는 것 같아 가입했다.


동아리 오리엔테이션 날, 모든 부원이 모인 술집에서 수린은 하진과 자신이 유일한 새내기이자 같은 학번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당시 술과 관련되어 벌어지는 각종 사건 사고에 교내에서만 오리엔테이션이 가능하다는 교칙을 깬 비밀스러운 술자리여서 다들 들떠 있었다. 술이 오가며 불콰한 얼굴이 된 사람들이 서로서로 침을 튀겼다.


무르익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수린의 기억에 남았던 건 하진의 미소와 사교성과 예의와 눈치와 명예였다. 외교관이라는 꿈, 십 년간의 미국 생활과 그로 인한 영어 실력, 졸업 후 이미 정해진 유명 기업 취직 자리, 건물을 몇 채 소유했다는 부모의 재력, 취미로 시작한 소설로 휩쓴 각종 문학상 등, 어떻게 한 시간 만에 자신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지, 이어지는 자랑에 놀라면서도 자랑을 자랑 같지 않게 말하는 하진의 말솜씨에 더 놀라는 수린이었다.


수린은 하진에게 붙은 빛나는 수식어에 점차 자신이 초라하다고 느꼈고, 자신의 인생이 참 희미하다고 느꼈다. 술자리가 파하고 하루하루가 흘러가면서, 하진을 향한 감정이 부러움과 경외심을 넘어 질투로 변해 갔다. 걷잡을 수 없는 그 감정의 요동침에 수린은 하진을 과도하게 미워하면서 한편으로는 하진에게 과도하게 착하게 굴었다.


페퍼민트차는 식어 가고 있었다. 이걸 시키는 게 아니었는데. 수린은 약간 후회했다. 수린은 오늘 하진에게 그간의 마음을 털어놓고자 했다. 하진의 반응을 상상해 봤을 때 최대한의 안정을 주는 게 페퍼민트차라고 생각했다. 수린은 자신의 실수에 대한 하진의 질문에 고장 난 기계처럼 이 말만을 하기로 다짐했다. 아니, 아니, 아니. 그렇지 않아, 그렇지 않아, 그렇지 않아. 집에서 나와 카페로 오는 내내 웅얼거리다 몇 명의 시선이 수린에게 꽂혔지만 수린은 그 사실조차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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