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픽션
3. 하진
몇십 분 뒤, 하진이 바깥의 찬 기운을 머금고 카페에 들어와 수린의 앞에 앉았다. 수린은 어정쩡하게 일어서다가 다시 앉았다. 입은 꾹 다문 채였다. 그 모습에 하진은 겉옷을 벗으며 무미건조하게 물었다.
“그래서 왜 보자고 한 거야?”
수린은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그동안 내가 너무 연락 못 해서 미안하다고. 그 말 하려고.”
그 말에 하진은 낮은 한숨을 쉬었다. 수린이 왜 항상 이런 모습인지 하진은 이해되지 않았다. 가면을 쓰고 시작한 관계의 끝이 이런 식이라는 걸 모를 리가 없으면서 뭐가 그렇게 미안한지. 정작 입 밖으로는 조소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도록 답했다. 수린이 아는 자신의 모습으로.
“괜찮아, 미안하긴. 우리 원래 그렇게 자주 연락하는 사이는 아니잖아. 뭘 그런 걸 신경 써.”
“고마워. 그…… 어떻게 지냈어?”
“난 뭐, 항상 바쁘지. 너는? 스고이는 여전히 잘 나가지?”
“안 나가, 이제 취업 준비해야 하니까. 난 잘난 게 없어서 부지런히 움직여야 해.”
하진은 수린이 자신에게 보이는 자기 비하적인 모습과 질투 어린 행동을 당연하다고 느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을 부러워하는 것, 그게 ‘하진’이라는 사람을 만들어 낸 이유였으므로. 하지만 수린은 그 감정을 숨기지 못하면서도 항상 환히 웃었고 더욱더 잘해 주려고 노력했다. 질투 나면 질투 난다고 말하든가, 싫으면 싫다고 말하든가, 수린의 지질한 가식이 거슬렸지만, 자신의 거짓말을 그대로 믿어 버리는 순진함이 가소로워 하진은 수린의 연락을 다 받아 주었다. 수린의 가식은 거짓말을 무기로 사용하는 하진에겐 눈에 보이는 재밋거리였고, 하진의 가식은 수린이 알지 못하는 하진의 컴컴한 어둠이었다.
“그 말은 무슨 의미였어? 내가 밉다는 말? 그 말 그대로 생각하면 될까?”
“아니, 아니야. 그렇지 않아.”
새해 날 새벽 두 시, 수린으로부터 네가 미워, 라는 문자를 받았을 때 하진은 돌연 모든 게 귀찮아져 이제는 수린을 떼어 놓고만 싶었다. 그래서 기회라고 생각했다. 네가 저지른 잘못으로 네가 직접 떨어지라는 하진의 속말을 수린은 영영 들을 수 없었다.
서로의 가면 아래 오래 잠식되어 이야기를 이어 가는 동안 하진은 자신을 향한 카페 직원의 눈길을 느꼈다. 왜 이렇게 거슬리는 인간들이 많지? 하진은 몸을 천천히 일으켜 그 직원에게 다가갔고, 조금 뒤 돌아온 하진은 수린에게 계속 말하라며 독려했다. 자신의 미래를 위해 마무리는 깔끔해야 했다. 하진은 수린의 말을 오늘 하루만은 다 들어줄 작정이었다.
4. 다시 민아
카페의 유일한 손님들이 돌아간 오후, 할 일이 없던 민아는 계산대에 기대서서 좀 전까지 스포트라이트가 비치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민아는 수린의 독특한 분위기와 하진의 묘한 실룩거림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가면, 그들은 보이지 않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고. 후에 민아의 예리한 시선은 하나의 이야기가 되어 가족들에게 전해진다.
“아까 말한 그 여자, 친구도 이상하더라, 기분 나쁜 웃음을 짓잖아. 내 생각에 그 둘은 분명…… 학교에서 만나 친하게 지냈을 거야. 그런데 어느 날 서로 좋아하는 남자가 같다는 걸 알게 된 거야…… 알잖아, 그 삼각관계. 이거 얼마나 심각한 일이야…… 오늘 결단의 날인 거야. 막 둘이 눈빛이 살아 있더라고…….”
사실 민아는 오늘 해고 통보를 받았다. 사유는 하진이 자신에게 맡긴 다이아 목걸이를 돌려주는 걸 까먹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카페에서 나가고 정확히 한 시간 뒤, 다시 카페로 돌아온 하진의 표정은 매우 심각했다. 마침 카페에 들어온 점장을 하진이 붙잡았고, 둘의 대화 이후 민아는 다이아 목걸이를 몰래 훔친 천하의 도둑이 되어 있었다. 도대체 뭐라고 구슬렸는지는 몰라도 점장은 이러한 사실이 낮은 책임감을 의미하며, 고객 신뢰도를 떨어뜨리며, 잘못된 소유의 욕망을 읽을 수 있다고 소리쳤다. 워낙 비싼 것이니 몸에 소지했다가 나중에 돌려 달라고 하진이 부탁한 사실은 민아만이 알았다.
민아는 집에 돌아와서야 자신이 왜 이러한 상황에 처했는지를 짐작했다. 하진이라 불리는 여자는 어떤 이유로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CCTV가 없는 곳에서 다이아 목걸이를 맡겼을 것이다. 민아는 억울하고 슬픈 감정을 어설프게 꾸며 낸 뒷말의 감정으로 감싸는 게 자신이 할 일이라 생각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가족 모두가 자신이 백수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십삼 년의 공로가 어이없는 해고로 돌아왔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어차피 내구성이 약한 페르소나니까, 누군가에 의해 부서지기 전까지만, 딱 그때까지만 써먹자는 생각으로 민아는 쉴 새 없이 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