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와 거짓말은 한 끗 차이 (1)

미니픽션

by 김항

랑은 즉흥 상황극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연기 학원에서 만난 그 누구보다도 더 말이다. 취미로 하던 연기에 열정이 붙은 건 완전히 랑 덕분이었다. 다만 문제는 랑이 연기와 실제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굳이 구분해야 할 필요를 못 느꼈다는 데 더 가까울 것이다.


요즘의 랑은 스터디카페를 운영하는 졸부를 연기한다. 경기도 북부에만 지점을 다섯 개를 가지고 있는데, 각 지점마다 순수익으로 오백만 원씩, 한 달에만 이천오백만 원을 벌어 주머니 사정이 여유만만하고 회원들에게 과도할 정도로 친절하며 고급 피부 관리에 눈뜬 삼십 대 여성. 어릴 적부터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랑은 구김살이라곤 찾아보기 힘들었고 늘 발랄했지만 모든 걸 빨리 지루해했다. 그래서 자꾸만 새로운 것을 탐닉했다. 그러나 무언가 채워질수록 랑의 삶은 낙을 잃어 갔다. 그저 어지러이 쌓인 명품 백이며 레고 로봇이며 한정판 원피스로 방만 더더욱 좁아질 뿐. 그래서 택한 것이 타인의 삶이었다. 매번 타인을 연기하는 것은 랑의 결핍을 채워 주기 충분했다.


랑에 대해 알면 알수록 이런 사람과는 친하게 지내면 안 된다고 혼잣말하는 날이 많아졌다. 거짓말을 일삼는 사람은 자신을 갉아먹는다. 그리고 주위 사람 또한 갉아먹는다. 그 사실을 직장 생활을 하며 모르고 싶어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매일 밤 자기 직전 랑, 이라는 이름을 종알거려 볼 때마다 속에서 터지기 직전의 폭죽이 치직 하고 준비 운동을 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 당시 나는 이 감정을 불쾌감이라고 쉬이 단정했다.


연기 학원에 다닌 지 한 달이 조금 넘었을 무렵이었다. 한 타임에 네 명이서 진행하는 즉흥 상황극에 랑과 나만 일찍 온 날이었다. 저녁 여덟 시였고, 밖은 포슬눈이 내렸다. 예상치 못한 눈 소식에 두 명이 늦는 듯했다. 학원 내부는 조명이 다 되어 가는지 전체적으로 약간 침침했으므로 나란히 앉아 곁눈질로 쳐다본 랑의 얼굴도 그늘져 보였다. 미미한 빛이 랑의 고양이 눈매와 부드러운 콧날에 내려앉았고, 나는 그 순간 작가와 감독과 배우 모두가 한마음으로 공들인 드라마 속 하이라이트 장면을 보는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공교롭게도 그 이후로 랑의 새로운 면모가 자꾸 눈에 띄었다. 연기 수업이 끝나면 선생에게 꼭 고생하셨다고 한마디 덧붙인다든지, 분위기를 얼어붙게 만드는 한 수강생의 개그에도 꼭 미소 지어 준다든지, 누구에게나 솔직 담백하게 연기 피드백을 하면서도 마지막엔 장점을 얘기해 준다든지, 집으로 돌아갈 때면 학원 창문 닫는 일을 도맡는다든지. 그런 사소한 것들에서 나는 디졸브 효과처럼 불쾌감이 새로운 감정으로 자연스레 전환되는 것을 느꼈다.


더군다나 우리는 즉흥 상황극만 했다 하면 연인이 되었다. 분위기 자체가 그렇게 흘러가기도 했지만, 랑을 바라보는 내 눈빛을 보면 사랑이 퐁 하고 솟는 것 같다는 둥, 동갑이라 더 잘 어울린다는 둥, 왜인지 그래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잠자리 안경을 낀 수강생 한 명이 둘만 있을 때 말해 준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대놓고 그 상황을 즐겼다. 랑도 그다지 나쁘지 않았는지 언젠가부터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때마다 차로 데려다주었다. 실상은 집 가는 길이 비슷해 예의상 한번 권해 본 것이겠다만 나는 그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았다.


그렇게 한 달이 더 지난 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랑의 운전기사가 코너를 꺾어 내가 사는 동네로 진입하던 순간, 나는 깨닫고 말았다. 랑이 내 마음 또한 실제가 아닌 연기로 생각한다는 것을. 어쩌면 실제인 걸 알면서도 연기라고 믿고 싶다는 것을.


“왜 우리는 항상 연인이 될까? 그렇게 잘 어울리나?”


랑은 뒷좌석 시트에 고개를 깊게 파묻곤 다리를 꼬았다. 나는 새어 나오는 미소를 오른쪽 창문을 바라보는 행동으로 겨우 숨겼다.


“그럴 수도 있겠지.”

“너 오늘 연기 진짜 좋더라. 누가 보면 깜빡 속겠어. 그렇게 사랑에 빠진 것 같은 연기는 대체 어떻게 하는 거야?”

“어…….”

“실은 진심이라거나 뭐 그런 건 아니지?”


나는 랑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허허하하, 라는 이상한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랑은 예의 그 매끈한 콧날을 찡긋거리며 환히 미소 지었다.


“다행이다. 사랑은 너무 빨리 질리거든. 연기는 연기로만. 깊게 들어가면 재미없어져.”



주말이었다. 연기 수업은 월, 수, 금 오후 여덟 시부터 열한 시까지 있었다. 랑을 보지 않는 주말이라 그나마 기운이 있어 첫 끼로 도시락을 먹기 위해 집 밖으로 나섰다. 편의점으로 가는 길에는 가게마다 화이트데이 홍보 상품이 밖에 진열되어 있었다. 연기 학원에 다닌 지 벌써 네 달째에 접어들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연기 학원을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랑이 내 마음을 알게 된 후로 연기에 대한 열정이 사라져 버렸다. 이전처럼 대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새어 나오는 마음을 갈무리하지 못한다면 그때는 정말 파국일지도 몰랐다. 랑은 온갖 거짓말로 나를 거절하기 위한 멘트를 꾸며 낼 테고 난 그게 랑의 진심인지 아닌지도 모른 채 오랜 시간 상처받은 상태로 살아갈 것이었다. 그러니 짝사랑은 여기서 접는 게 옳다. 더 멀리 가면 이 또한 사람의 정신을 갉아먹는 짓이므로.


“어디 가?”


편의점에 거의 다다랐을 때쯤, 한겨울에도 미니스커트에 초록색 하이힐을 신은 여성이 내 앞에 섰다. 나긋하지만 자신감 있고 살짝 우수에 젖은 듯한 목소리. 랑이었다.


“아, 나는 여기 편의점에 좀.”


랑은 나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뭐 사게?”

“아침을 못 먹어서…….”


나는 말하면서 입가의 수염을 손으로 쓸었다. 양치는 했나? 잠깐 나오는 거라 생각하고 머리도 안 감고 슬리퍼나 대충 신고 나왔는데……. 머릿속으로 온갖 욕이 떠올랐다. 하필이면 이런 상황에서 만날 게 뭐냐고.


“밥 내가 사 줄게. 나랑 어디 좀 같이 가.”


랑은 내 어깨를 툭 치곤 뒤돌아 걸어갔다. 하이힐의 또각또각 소리가 지나치게 선명해서 정신이 들었다. 주말에 랑과 함께 밥을 먹는다고? 내 몰골을 생각하는 것조차 사치였다. 나는 편의점 통창에 비친 실루엣으로 머리를 대충 정리하곤 랑의 뒤를 따랐다. 랑의 발걸음이 신나 보이는 건 나의 착각일 것이라 짐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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