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드라마, 사회가 만들어낸 여성상
1990년대, 한국 사회는 겉으로 보기엔 여성에게 새로운 문을 열어주고 있었다.
대학 진학률이 급격히 높아졌고, 교사·간호사·공무원뿐 아니라 전문직 여성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언론은 이를 ‘진보’라 불렀고, TV와 잡지는 ‘성공한 커리어우먼’이라는 새로운 여성상을 만들어냈다.
화면 속 여성은 늘 완벽했다.
집에서 살림하고 내조를 하는 우리 엄마 세대의 삶은 무능력함으로 평가절하되며,
정장 차림으로 회의실을 누비며 성취를 이루고, 퇴근 후에는 앞치마를 두르고 저녁 식탁을 차리는 사람.
일도, 사랑도, 가정도 모두 해내는 사람이었다.
그런 여성을 서구화되고 진보한 시대의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포장하기 시작했다.
언론에서는 “일도 사랑도 완벽하게!”를 외쳤고, 잡지 표지에는 “워킹맘의 성공 노하우”, “슈퍼우먼의 하루 루틴”이 실렸다.
당시 ‘슈퍼우먼’이라는 단어는 찬사였다.
모든 걸 해내는 여성, 능력 있고 성실하며 가족까지 돌보는 이상적 존재.
하지만 그 찬사는 사실 교묘한 명령문이었다.
‘너도 이렇게 해야 한다.’
‘이 정도는 해내야 진짜 멋진 여자지.’
사회는 여성들에게 선택권을 준 적이 없었다.
일을 하려면 가정도 포기하지 말라고 했고,
가정을 지키려면 일도 포기하지 말라고 했다.
어느 쪽이든 포기하는 순간, “무능력한 여자”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한국 사회의 슈퍼우먼 신드롬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어날수록
그들을 응원하는 척하며
‘모든 걸 해내야 한다’는 기준이 높아졌다.
그때부터 여성들은 두 개의 무대에서 동시에 연기하기 시작했다.
회사에서는 유능한 프로페셔널로,
집에서는 헌신적인 엄마로.
이중 무대에서 넘어지면 ‘노력 부족’이 되었고, 잠시 쉬면 ‘포기자’가 되었다.
“일도 가정도 다 갖지 못한 여자”는 실패한 인생으로 분류됐다.
사회는 여성들에게 칭찬을 건넸지만,
그 칭찬은 언제나 조건부였다.
“너라면 다 할 수 있잖아.”
그 말은 격려의 말처럼 들렸지만,
실은 구조적인 명령이었다.
그 말 한마디로 여성들은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도움을 청하면 “역시 여자라서 힘들지?”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 참았다.
휴가를 내면 “역시 애 엄마라 일에 집중 못해.”라는 시선을 견뎌야 했다.
그렇게 ‘슈퍼우먼’은 한 사회의 자랑이자, 동시에 가장 완벽하게 길들여진 여성상이 되었다.
“슈퍼우먼 신드롬”은 한 세대의 성취를 이끈 정신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여성들의 피로와 자기소멸을 정당화한 사회적 가스라이팅이었다.
칭찬으로 시작된 그 말
“넌 다 할 수 있잖아.”
그 말이야말로, 여성들을 침묵 속에서 소진시킨 가장 완벽한 구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