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과 희생을 혼동한 사회
“너라면 다 할 수 있잖아.”
'You can do it'
황규영의 <나는 문제 없어>
이 세상위엔 내가 있고
나를 사랑해 주는
나의 사람들과 나의 길을 가고 싶어
많이 힘들고 외로웠지
그건 연습일 뿐야
넘어지진 않을 거야 나는 문제없어
이 노래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오랫동안 내 삶의 구호였다.
'많이 힘들고 외로워도 넘어지진 않을거야. 나는 문제없어.'
그 믿음은 나를 버티게 하는 주문이었다.
직장에서도 그 말은 늘 내 곁을 맴돌았다.
데드라인이 코앞이어도,
관계가 틀어진 프로젝트에 투입되어도,
우리 부서의 일이 아니더라도,
해결사처럼 나서서 해결하는 나를 보며
사람들은 말했다.
"역시 김과장이면 다 해결돼"
그 말이 자랑스러웠다.
‘그래, 나니까 할 수 있지.’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다시 일터로 돌아오니
그 말에 대한 나의 책임과 의무가 더 가중되었다.
"애기 엄마들은 이래서 안 돼."
"여자들은 이래서 프로젝트에 못 넣는다니까."
그런 말들이 내게는 전쟁의 선포 같았다.
누군가는 버티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내 뒤의 여성들이 불이익을 받지 않을 거라 믿었으니까.
그래서 더 열심히, 더 완벽하게 해내려 했다.
하지만,
‘넌 다 할 수 있으니까, 다 해야지.’
그 말 뒤에는 언제나 숨은 문장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도와주지 않아도 되겠지?’
회사에서는 능력을,
집에서는 모성을,
사회에서는 헌신을 요구했다.
그리고 그 모든 요구는 한 문장으로 포장됐다.
“넌 다 할 수 있잖아.”
그 사이, 거울 속의 나는 점점 달라지고 있었다.
눈 밑이 꺼지고, 웃음 대신 일정표가 달려 있었다.
회의 준비, 장보기, 식사, 청소, 빨래, 아이 숙제, 명절 음식...
모든 일을 해내야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아이가 한 명 더 늘어날 때마다,
직장에서 직급이 오를 때마다,
나의 책임과 일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그럼에도 나는 나 자신에게 조차
"적당히 해도 돼"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아니,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당연히 나는 다 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할 수 있다! 더 할 수 있다!”
나는 웃으며 일했지만,
일이 늘어나는 속도로 내 존재는 희미해졌다.
“나는 다 할 수 없다.”라는
그 단순한 문장을,
나는 끝내 인정하지 못했다.
수면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몸은 아파도 말하지 못했다.
주말이면 음식을 싸 들고 시댁에 찾아가고,
겨울되면 김장을 하고,
새벽이면 다시 일어났다.
그러다 문득,
소파에서, 의자에서,
심지어 화장실에서도 잠든 나를 발견하곤 했다.
5분, 10분, 몸이 생존을 위해 나를 강제로 꺼버리는 시간이었다.
‘다 하지 않아도 괜찮은 삶’은
누가 허락해주는 게 아니라
내가 나에게 허락해야 하는 삶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아직 패배를 인정할 줄 몰랐다.
패배를 인정할 수 없었으므로...
그리고 그것이,
나를 가장 지치게 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