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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없으면 안 돌아가"라는 착각

헌신이 자존감이 된 구조

by Erica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그레고르 잠자는 자신이 거대한 벌레로 변해 있음을 깨닫는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며 하루도 빠짐없이 출근하던 그는, 어느 날부터 가족에게 ‘쓸모없는 존재’가 된다.
그가 죽었을 때조차 가족은 슬퍼하기보다 안도하며 새로운 삶의 계획을 세운다.
그의 부재 속에서도 세상은, 심지어 가족들도 아무 일 없다는 듯 돌아간다.

카프카의 『변신』의 내용인데, 어릴 때는 이 장면이 그저 기괴하게 느껴졌지만, 나이가 들어 다시 읽으니 가슴이 울컥했다.

그레고르의 이야기가 어느새 내 모습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 없으면 안 돌아가.’

겉으로는 말하지 않아도, 마음속에서는 늘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없이 집이 돌아가겠는가?'
엄마는 아파도 안 된다.
엄마가 아프면 집이 멈춘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정말 그렇지만, 아이들이 자라고, 10대가 지나면서

이제는 오히려 내가 한발 물러서야 할 순간이 많아진다.
하지만 십 년 넘게 쌓인 책임감과 그로부터 생긴 자존감은 쉽게 놓을 수 없게된다.


‘내가 없어도 된다’는 자각이 들수록, 존재의 이유가 사라지는 것 같은 공허함이 찾아오게 된다.
그래서 많은 엄마들이 그 경계에서 흔들리고, 때로는 우울감에 빠지기도 한다.

‘필요한 사람’이라는 감정은 피곤하면서도 버릴 수 없는 마취제다.

억울하고 힘들어도,
'그래도 나니까 이 집이 굴러가.'
그 말은 스스로를 다독이는 위로이자, 동시에 족쇄였다.


응답하라 1988의 한 장면이 역시 생각난다.
라미란(엄마)이 친정엄마의 사고로 병간호를 위해 며칠 집을 비우게 되는데,
그녀는 떠나며 걱정한다.
'나 없으면 집이 난장판이 되겠지. 남자 셋이 밥은 제대로 챙겨 먹을까?'
하지만 돌아와 보니, 집은 의외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물론 엄마가 도착하기 전 세 남자의 ‘청소 총력전’ 덕분이었지만,
그 순간 라미란은 묘하게 서운한 감정을 느낀다.
“나 없어도 잘 돌아가네.”


카프카의 『변신』과 응답하라 1988의 그 장면은 내게 같은 울림을 주었다.

세상은, 가족은, 일터는

내가 혼자 돌리는 기계가 아니었다.

마음속에 한 줄이 써졌다.
'나 없으면 안 돌아간다는 건 착각이다.'


빈자리가 생겨야
그 안으로 바람이 통하고, 사람이 자란다.


이제야 나는 ‘나 없이도 돌아가는 세상’을 믿게 되었다.
그건 상실이 아니라, 해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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