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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 가정 사이의 죄책감 경제

누군가에게 늘 빚진 감정

by Erica

“미안해.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여자의 하루는 사과로 시작해 사과로 끝난다.
회의에 늦을까 봐 아이를 재촉하며 “미안, 엄마가 급해서 그래.”
업무 중에 아이한테 전화가 오면 “미안, 지금 회의 중이라 나중에 이야기하자.”

회사에서 정시 퇴근을 하면서도, "죄송합니다. 일찍 가보겠습니다."
퇴근 후 정장차림으로 늦은 저녁을 차리며 “오늘 저녁 늦어서 미안해.”
미처 다리지 못한 셔츠를 급히 다리며 “미안해, 미리 준비해 주지 못해서.”

남편에게도 늘 미안하다.
저녁 식탁 앞에 앉아 있는 그에게 “오늘은 반찬이 부실하지? 미안해.”

피곤해 쓰러지듯 잠들기 전엔 “요즘 내가 신경을 못 써서 미안해.”라고 중얼거린다.

가족을 위해 하루 종일 달렸는데도,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미안한 사람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올린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뭐가 그렇게 미안한 걸까?
왜 ‘부족함’과 ‘모자람’의 감정이 늘 우리 곁을 따라다니는 걸까?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남자와 여자는 같은 상황에서도 죄책감을 느끼는 빈도가 다르다고 한다.
여자들은 남자보다 죄책감을 훨씬 더 자주, 더 강하게 느낀다고 한다.
특히 ‘일과 가족 사이의 역할 갈등’ 상황에서는 여성이 평균 두 배 이상 높은 죄책감 지수를 보였다고 한다.

그건 단순히 성격 차이가 아니라, 성장 과정에서 내면화된 ‘돌봄의 의무’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우리는 “남을 배려해야 한다”, “가족을 챙겨야 한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듣는다.
그래서 ‘누군가를 먼저 챙기지 못했을 때 느끼는 불편함’이 거의 반사적인 감정처럼 몸에 배어 있다.


반면 남자들은 사회적으로 ‘성과 중심의 역할’을 배우며 자란다.
그들에게 ‘좋은 남편’이나 ‘좋은 아버지’의 기준은 돌봄의 세심함보다 ‘경제적 책임’이나 ‘문제 해결 능력’에 더 무게가 실린다. 그래서 회사에서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오늘 할 일을 다 했다’는 완결감을 느낀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이제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동일한 수준의 경제적 책임과 성취를 요구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가정에서의 돌봄'은 주로 여성의 몫으로 남아있다.


결국 퇴근 후 집은 남자에게는 휴식의 공간이 되지만, 여자에게는 여전히 또 다른 업무의 연장선이 된다.

이 차이는 개인의 의지나 성격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남녀에게 서로 다른 정서적 역할을 끊임없이 주입해온 결과다. 남자는 퇴근하면 ‘쉴 자격이 있다’고 배우고, 여자는 퇴근해도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았다’고 배운다.
이 불균형한 감정 구조가 바로 ‘죄책감 경제’를 유지시키는 가장 강력한 연료다.


여자의 마음속에는 보이지 않는 회계 장부가 있다.
회사에서는 “가정 때문에 미안합니다”를 지불하고,
집에서는 “일 때문에 미안해”를 내어놓는다.
한쪽에서 덜어낸 만큼 다른 쪽에 빚이 쌓인다.
이 빚은 결코 다 갚을 수 없고, 언제나 부족하다.
그래서 우리는 더 열심히 일하고, 더 많이 헌신한다.
하지만 그 노력의 끝에는 보상이 아니라, 소진과 자기비난이 기다리고 있을 때가 많다.


이제는 물어야 할 때다.
정말 우리가 미안해야 할 일일까?
그 죄책감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만들어 놓은 구조적 감정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제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야 한다.
엄마 혼자 모든 걸 완벽히 해내야 하는 것도,
누군가의 기대를 끝없이 채워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 시작은 거창한 변화가 아니라, 나부터 생각을 바꾸는 일이다.
내 아이들이 나의 미안함을 보고 배우지 않도록,
다음 세대에서도 이 감정이 반복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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