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내 안의 상사, 내 안의 시어머니

이미 내면화된 시선의 폭력

by Erica

남편이 살이 빠지면, 아내들은 묘한 죄책감을 느낀다.

“요즘 당신 얼굴이 너무 말랐어.”

그 말 속엔 언제나 숨은 의미가 따라온다.

‘밥은 제때 해주고 있니?’

반대로 살이 조금 찌면 또 다른 화살이 돌아온다.

‘너무 기름진 반찬만 해줬나, 요즘 배달음식을 많이 먹였나?’

이해받지 못할 만큼 과도한 자기 검열이지만, 이런 생각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떠오른다는 게 문제다.

아내들은 이미 누군가의 시선을 마음 안에 심어놓고 살아왔다.


그 시선은 오래전부터 우리 사회가 여성에게 학습시켜온 ‘돌봄의 책임은 오롯이 네 몫’이라는 메시지에서 비롯된다. 남편이 건강하지 않으면 아내 탓, 아이의 컨디션이 안 좋으면 엄마 탓, 집안일이 미뤄지면 게으른 여자의 탓. 이 공식은 여전히 강력하게 작동한다.


결혼은 흔히 성인 대 성인의 동등한 관계로 불린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남편들의 무의식 속에는 ‘아내는 시어머니의 연장선’이라는 관념이 자리한다. 결혼식 날, 부모에게서 독립한 두 사람이 새로운 가족을 이룬다고 하지만, 현실 속의 결혼은 여전히 ‘돌봄의 위탁’처럼 이어진다. 시어머니가 하던 가사를 아내가 이어받고, 그 돌봄의 빈자리를 당연히 채워야 하는 존재로 규정된다. 그래서 남편이 아내에게 묻는 말은 종종 이런 형태다.

“청소 했어?”

“밥은 언제 줄거야?”

“집에 먹을 건 있어?”

“빨래는 왜 안나와?”

이 말들은 단순한 일상 대화처럼 들리지만, 그 안에는 ‘관리자’로서의 감시 시선이 숨어 있다. 그 시선은 부부 관계를 성인 간의 파트너십이 아니라 ‘업무 보고’와 ‘평가’로 바꾸어 버린다.


이 관계 속에서 여성은 언제나 스스로를 점검하게 된다.

“집이 지저분한데 화내겠네?”

“저녁 배달 시키면 아이들 건강은 생각하는 엄마냐고 화내겠지?”

이런 생각들은 어느새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자기 내부의 감시자로 변한다. 무서운 것은, 이제는 남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내 안의 ‘상사’와 ‘시어머니’가 자동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퇴근 후 집에 들어오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치워지지 않은 식탁이나 쌓인 세탁물이다. 피곤해서 쉬고 싶으면서도

"이 상태로 누워 있으면 화내겠지?",

"지금이라도 청소기 한번 돌려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이 나를 일으킨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다. 이미 내 안에 내장된 감시 체계가 스스로를 움직인다. 이 감시자는 휴식의 순간에도 일을 시키고, 쉬는 법을 잊게 하며, 아무도 없는 집에서도 누군가 보고 있는 듯한 불안을 만든다.


그 내면화된 감시자는 어디서 왔을까. 그 뿌리는 ‘현모양처’라는 오래된 이상상에 있다. 경제활동을 하든 하지 않든, 가족을 앞세우며, 늘 정갈한 집안과 정성스러운 밥상을 유지하는 사람. 그 이미지가 사회적으로 칭찬받고, 그 반대의 모습은 쉽게 비난받았다.


그래서 우리는 모르게 배웠다. 집안일의 완벽함이 나의 인격이며, 가족의 건강이 나의 성적표이고, 남편의 몸무게조차 나의 돌봄 점수라는 것을. 그 결과, 여성은 타인의 삶을 관리하며 자신의 삶을 돌보는 일을 미뤄왔다. 집이 깨끗해야 마음이 편한 게 아니라, 누군가의 눈에 들기 위해 마음을 소모하게 된 것이다.


진짜 문제는 바로 이 ‘감시자의 내면화’다. 누군가의 요구가 사라져도, 그들의 목소리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그들을 마음속에 들여보냈고, 그들은 여전히 우리를 평가하고 있다.


그 평가를 멈추게 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첫걸음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