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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가돌봄이 사치가 되는 사회

느림이 우리에게 다시 말을 걸어올 때

by Erica

하루가 끝나갈 무렵,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오늘 하루, 나는 나에게 한 번이라도 다정했을까?”


아침엔 아이를 깨우고, 아침을 차리고, 도시락을 싸고, 서둘러 회사로 향한다.
퇴근길엔 장을 보고, 저녁을 차리고, 치우고, 숙제를 봐주다 보면 어느새 밤이 깊어간다.
숨이 찰 만큼 바쁘게 살았는데, 마음 한쪽은 구멍 난 듯 허전하다.
할 일은 모두 해냈지만, ‘나’라는 사람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육아와 일을 함께 짊어진 엄마들에게
‘쉼’은 늘 가장 나중으로 미뤄지는 일이다.
쉬고 싶다는 마음조차 어쩐지 사치처럼 느껴지고,
“이럴 시간에 청소라도 해야지”, “내일 발표 자료나 다시 확인해야지” 하며
또다시 자신을 챙기는 것을 뒤로 미룬다.


그럴 때 문득, 『느리게 산다는 것』의 문장이 마음속을 스친다.
“우리는 살아가는 법을 배우느라, 정작 삶을 잃어버렸다.”

『느리게 산다는 것』에서 저자인 피에르 쌍소는 삶은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감각의 문제라고 전한다.
빨리 간다고 더 많이 사는 것이 아니며, 느리게 살아야 비로소 ‘지금’을 느낄 수 있다고.


이 문장은 엄마의 하루 속에서 더욱 깊게 다가온다. 우리는 세상의 기준에 맞추느라 너무 많은 걸 놓치고 있다. ‘좋은 엄마’, ‘유능한 직원’, ‘성실한 아내’라는 이름 아래 자신을 돌보는 일은 늘 우선순위 밖으로 밀려나기 일쑤다. 아이의 건강, 가족의 끼니, 회사의 마감은 챙기면서도 정작 나의 피로, 나의 감정, 나의 시간을 돌보는 일에는 인색해지며 내 시간은 언제나 '남는 시간에'나 가능한 일처럼 취급된다. 더 많이 일하고, 더 오래 버티는 사람이 한층 우월한 가치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나를 더 몰아칠수록 '의미 있는 사람'이라 착각하기 때문일까? 그러다 잠시 멈추려 하면, 세상은 그것을 게으름이라 부르고, 나를 돌보려는 마음마저 사치라고 비난한다.


하지만 돌봄은 단지 아이만을, 가족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나를 돌보는 일 또한 누군가에게 허락을 구할 필요가 없는, 삶을 버티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토대에 가깝지만 우리는 늘 그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닫곤 한다. 내가 건강해야 가족이 건강하고, 내가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아이와 가족의 마음을 받아줄 수 있는데도 말이다. 그러다 보니 “엄마의 쉼”을 스스로조차 ‘보상’이나 ‘보류’의 형태로만 허락하고, 쉴 수 있는 순간에도, 쉴 용기를 내지 못한다.


퇴근 후 소파에 몸을 눕히는 잠깐의 시간에도 보이지 않는 시선, 마음의 불안함이 따라붙어
“이럴 여유가 있나?”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시 조인다. 결국, 스스로를 더 몰아붙이며 또 하루를 버티게 한다.


그럴 때마다 『느리게 산다는 것』의 또 다른 문장을 의식적으로 떠올린다.
“느리게 산다는 것은 뒤처지는 것이 아니라, 삶을 되찾는 일이다.”
이 문장은 엄마들에게 꼭 필요한 위로이자 다짐이다.


우리가 원하는 건 대단한 휴가나 완벽한 고요가 아니다.
그저 따뜻한 햇살 아래 커피 한 잔을 천천히 마실 시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권리,
그리고 내 마음의 속도를 따라 하루 10분 걸을 수 있는 여유.
그 정도면 충분하다.


그래서 오늘만큼은, 이렇게 말해보고 싶다.
“괜찮아, 오늘은 좀 느려도 돼.
오늘은 너를 먼저 챙겨도 돼.”

자기 돌봄은 결코 이기적인 일이 아니다.
오히려 세상의 충격에서 내가 부서지지 않을, 길게 살아낼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 지혜로운 방법이다.

내가 내 마음을 돌볼 때, 그제서야 가족의 행복도 진짜로 가능해진다.

아이를 키우며, 일을 하며, 삶을 버티는 엄마들에게 나는 꼭 이 말을 전하고 싶다.

“당신의 속도로, 당신의 방식으로 살아도 괜찮아요.”


오늘 하루, 단 몇 분이라도 자신에게 쉼을 내어줄 수 있다면,

그건 세상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가장 다정한 자가돌봄의 시작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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