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탈주의 기술들

일상에서 나를 지키는 방법에 대하여

by Erica

예전에는 탈주라는 말을 조금 과격하게 느꼈다.
어딘가를 떠나야 할 것 같고,
지금의 삶을 부정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요즘 내가 말하는 탈주는

그런 것이 아니다.
여전히 같은 집에 살고,
같은 일을 하고,
같은 사람들을 돌보면서도
중간중간 나를 잃지 않는 방법에 가깝다.


하루는 여전히 해야 할 일들로 가득하다.
일을 하고, 집안일을 하고,
누군가의 하루를 챙기다 보면
나의 하루는 늘 가장 마지막에 놓이기 쉽다.

그래서 나는 완전히 떠나는 대신
잠깐씩 빠져나오는 쪽을 선택했다.
아주 작고, 눈에 띄지 않는 방식으로.


누구도 나를 찾지 않는 시간을 만들어
혼자 걷거나,
아무 목적 없이 음악을 골라 감상하거나,

재밌는 책을 한 편 읽는다.


때로는 주변 둘레길을 천천히 걷고,

짦은 등산을 다녀오기도 한다.

숨이 가빠지는 러닝을 하거나,

재밌는 드라마를 보며 헬스장에서 천국의 계단을 오른다.


해야 할 일 목록에서 잠시 벗어나는 일.
그 시간들은 생산적이지도, 대단하지도 않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만큼은
아무 역할도 수행하지 않는 나로 존재한다.


이 작은 탈주가 가능해지기까지
가장 오래 걸린 것은
시간을 확보하는 일보다
죄책감을 내려놓는 일이었다.
이래도 되나,
지금 이럴 여유가 있나,
나중에 해야 할 일을 미루는 건 아닐까
스스로를 설득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깨달았다.
나를 지키지 않으면
결국 아무것도 오래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탈주는 도망이 아니다.
다시 돌아오기 위해 숨을 고르는 일이다.
나를 잠시 회수해
다시 일상으로 데려오기 위한 준비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같은 삶을 살지만
예전보다 조금 덜 소진된다.
하루가 끝났을 때
오늘의 내가 아주 조금이라도
나만의 즐거운 기억이 마음에 남는다.


작은 탈주의 기술들은
삶을 바꾸지 않는다.
다만 삶 속에서
나를 사라지지 않게 만든다.

완벽하지 않은 하루 속에서도
나를 지켜내는 방식으로
조용히 작동한다.


크게 떠나지 않아도,
모든 걸 내려놓지 않아도
나를 지킬 수 있는 방법들을 소소하게 채워나가고 있다.


이 작은 탈주들이
나를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