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미국 보스턴미술관에는 폴 고갱(Paul Gauguin)의 마지막 유작이 전시되어 있다. 어딘지 차갑고 정치적인 묵직함이 느껴지는 도시 분위기와 맞지 않은 이 그림은 고갱이 파란만장했던 파리생활을 뒤로 하고, 자신의 혼혈 인종 뿌리를 찾아 간 타이티 섬에서 말년에 그린 역작이다. 캔버스의 왼쪽 위 구석에 써 놓은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라는 그림의 제목도 의미심장하다.
이 그림은 다시 보게 된 것은 작년 12월에 작고한 통섭의 과학자 Edward Wilson의 쓴 <지구의 정복자> 책표지에서 였다. 윌슨 역시 사회생물학자 분야에서 한때는 이단아 취급을 받았지만 끈질김으로 일가를 개척하였다. 그가 마지막에 도달한 깨달음 역시 이 질문에 도달하며 멈추었다. 포항공대 물리학과 정우성 교수는 이런 질문들 사이에 ‘우리는 어떻게 모여사는가?’라는 물음을 하나 더 밀어 넣었다. 이 질문이 훨씬 도시에 가깝다.
나는 전쟁과 전염병 같은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끔찍한 상황을 만날 때, 어떤 연유에서 기인했는지 모르지만 자신의 마음이 수만가지 파편으로 흩어질 때, 대규모 군집을 이루며 살아가는 도시인의 무의미한 움직임을 느낄 때 이 그림을 떠올리곤 한다. 그리고 그들처럼 물어 본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Where Do We Come From? Where Are We Going?)’. 그리고 이 선형적 흐름위에 ‘지금 우리는 무엇인가(What Are We?)’를 묻는다. 우리는 왜 모여 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오늘날 디지털로 무장한 똑똑한 사람들이 도시에 몰리면서 높은 삶의 질과 더 높은 편의성을 도시에 요구한다. 도시는 인공지능이나 빅데이터, 초정밀 센서들로 무장한 영리한 도시기능과 함께 더 높은 민주성과 자율성을 보장해야 한다. 현대 도시는 그속에 살아가는 개인 삶의 질과 성장토대를 어떻게 제공하느냐에 따라 흥망성쇠가 판가름된다. 허브 구조가 가지는 치명적 약점, 즉 자그마한 나비 날개짓 하나로 일순간에 시스템 전체를 붕괴될 수 있다는 위험성 때문에 도시관리자들은 더 촘촘한 감시망을 원하며, 자유에 대한 시민의 갈망은 다원화되고 저항이 흩어진다(사실 우리는 백지상태의 무제한 자유를 주면 어찌해야 할지도 모르면서도 그런 자유를 갈망한다. 도시는 개인 욕망의 총화이면서 모든 문제의 원초다). 이 틈새가 어쩌면 표준이라는 새로운 시장의 영역일지도 모른다. 표준을 사이에 두고 시민의 질주하는 욕망과 도시의 리더들의 통치가 서로 커뮤니케이션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