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르볼 브리야 Apr 19. 2021

두 번째 집주인, 룰리

첫 번째 집은 꼰데사 초아판 길에 있었다. 집 앞에는 하까란다가 활짝 핀 나무가 있었고 바로 옆 건물에는 가정식을 판매하는 가게가 있어서 맛있는 냄새가 솔솔 새어 나왔다. 건물 안 조금 오래된 듯한 복도가 마음에 들었고 문을 열어주고 활짝 웃은 채로 맞이하는 오수를 보며 마음을 굳혔다. 이 집으로 이사 오기로. 그리고 오수는 첫인상대로 정말 멋진 팬데믹 버디가 되어주었다. 일주일 후 도착한 마이떼까지도. 나는 그 둘과 정말 재밌게 살았다.


두 번째 집은 꼰데사 옆을 벗어나 에스깐돈으로 갔다. 구역은 나뉘었지만 초아판 집에서 10분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두 번째 집은 첫 방문이 밤이었는데도 집 전체가 화이트톤인게 느껴졌다. 낮에 볕이 들어오면 정말 멋지겠다, 그 확신에 사로잡혀 나는 마이떼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우리 저기로 이사 가자. 저기 정말 좋을 것 같아.


사실은 집 구하는 게 급해서 몇 가지 신호를 무시하기도 했다. 두 번째 집주인인 룰리는 처음 보는 나에게 이전 세입자 욕을 한 시간가량 했다. 이전에 살았던 베네수엘라 여자애는 정말 별로였어. 나는 렌트를 많이 해본 사람이라 각국의 사람을 많이 만나봤지. 미국인은 문제가 없어. 유럽 사람들도. 하지만 나는 라틴아메리카에 사람들은 잘 안해주려 하는 편이야. 여기 1층에 사는 아르헨티나 여자애는 가구를 제멋대로 바꿨어. 그게 정말 기분 나빠. 여긴 어찌 됐든 내 집이야.


처음이니까 어른 말을 자르기가 조금 조심스러웠고, 일단 집은 좋으니까 렌트 내는 날만 마주치면 될 줄 알았다. 이전 집주인이 내가 회사에 간 사이 방 안에 들어와 사진을 찍고, 창문을 열어놔서 도둑이 들면 나보고 손해배상을 다하라는 등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길래 집 구하는게 급했다. 그래서 그런 신호를 무시한 채 집을 옮겼다.

다행히 집은 좋았다. 초아판 집은 상대적으로 볕이 잘 들어오지 않았던 곳이라 마이떼와 나는 새 집을 정말 마음에 들어 했다.


문제는 룰리가 집을 훔쳐본다는 점이었다. 이사 직후 마이떼가 가져온 의자를 둘 곳이 없어 집 밖에 잠시 빼놓았다. 룰리는 그것을 보고 당장 처리하라고 이틀에 걸쳐 문자를 보내고 외출하려는 우리를 불러 세웠다. 그건 다시 사무실에 가져다 두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냉장고도 문제였다. 룰리의 오래된 냉장고는 곰팡이가 구석구석 피어있어 사용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닦아내며 사용할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중고 냉장고를 하나 샀다. 이전 냉장고 상태를 말하며 곰팡이가 너무 심하게 피어있었다고 말하자, 나보고 유난이라며 너가 닦아 쓰면 되지 않느냐고 뭐라 했다. 나는 지금 냉장고를 샀으니 이전 냉장고는 창고에 보관하자고 했더니 그건 싫단다. 결국 원하는 것은 새 냉장고를 두고 가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겠다고 답했다.


재택근무 중일 때는 오전 열한시면 초인종을 눌러 우리가 내려다보면 커튼을 치라고 소리를 질렀다. 룰리는 현재 내가 렌트한 집의 가구를 매우 아끼는데 햇볕에 닿아서 상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는 게 이유였다. 마이떼와 나는 초반에는 커튼을 이렇게 치면 되나? 이러면 되나? 최대한 맞춰주었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집에서 창문도 제대로 못 열었다.


어느 날은 근무시간에 룰리가 올라왔다. 룰리는 당장 나랑 같이 사는 마이떼의 인적 사항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룰리와 계약을 한 당사자는 나이며, 잠시 머무는 마이떼의 인적 사항까지 요구하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말했다. 또한 지금은 마이떼가 회의에 들어갔기 때문에 시간을 내는 게 어렵다고 돌려보냈다. 그러자 룰리는 그날 저녁까지도 왓츠앱 문자를 보내며 당장 마이떼의 여권 및 비자 복사본을 보내라고 재촉했다.


또한 룰리는 수도세, 전기세 등을 재차 요구했다. 계약 당시에는 각종 공과금은 자신이 부담하겠다고 했으나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말을 바꾼 것이다. 나는 그 당시 왓츠앱으로 공과금은 내가 부담할 테니 우리집에 오지 않겠냐고 제안한 계약 이전에 녹음된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자 룰리는 내 목소리가 아닌데, 누구 목소리를 보내냐며 소리를 질렀다. 아 결국은 돈이구나.



여기서 더 이상 살기는 어렵다는 생각을 했다. 계약 당시 나는 룰리에게 같이 사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의 귀국 계획이 불투명하므로 오랜 기간을 계약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4개월을 말하였으나 룰리는 8개월을 제안했고 네가 가고 싶으면 언제든지 가도 된다며 한 달 이전에만 말해달라고 했다. 그것은 이전 집주인과 같은 방식이었다.


룰리에게 말하자, 그날 룰리의 눈이 뒤집어졌다. 당장 소리를 지르며 한 시간가량 말을 끊지 않고 협박에 나섰다. 나가고 싶으면 지금 당장 돈을 다 내라는 것이었다. 여기 멕시코는 내 나라이며, 내 나라에서는 나이 든 어른을 공경해야 한다는 법이 있다고 했다. 여기는 나의 자식이 있으며, 내 변호사가 있고 언제든지 경찰을 불러 끌고 갈 수 있다는 게 요점이었다.


나는 더 이상의 대화를 이어나가는 게 어렵다고 판단했고, 화난 사람이랑은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다며 집을 나가겠다고 말했다. 룰리는 한 손으로 당장 이리 와! 라고 소리를 질렀다. 난 당신의 애완견이 아니니 얘기하고 싶으면 태도를 다시 하라고 말했더니 룰리는 거의 발작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날 밤 새벽 한 시까지 룰리가 왓츠앱으로 전화를 걸었다. 나는 왓츠앱을 수신 차단했다. 그러자 룰리는 마이떼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마이떼는 그 새벽에 내려가서 룰리가 내쏟는 비방을 들었다. 누군가에게 폐 끼치는 것을 끔찍하게도 싫어하는 나는 속이 썩어 문드러질 것 같았다.


이후에 집에 온 마이떼는 내가 가끔 심각하게 말하며, 부드럽게 말하지 않는다고 그러며 룰리에게도 비슷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나이 든 어르신은 공경해야 한다며, 조금 더 이해해 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불쌍한 룰리, 하면서 웃기도 했다. 네가 나쁜 기운을 가지고 있어서 이사가면 성스러운 물을 가져다 뿌릴거래. 나는 나이 든 사람을 이해해. 나는 독일에서 교환학생 할 때도 나이 많은 분들과 친구를 했었어.


하지만 나는 웃기지 않았다. 마이떼의 조용한 성정을 아는 내가 전면에 나서서 룰리와 부딪히니까 마이떼는 그 면을 모른 것 뿐이다. 그 다음날 룰리는 우리 집에 올라와서 또 문을 두드렸다. 자전거를 핑계로 올라와 자전거를 조금 더 벽면에 붙여서 두고 그 다음부터는 내 욕을 시작했다.


마이떼, 착한 마이떼. 날 두고 가지마. 나는 저 더러운 중국년이랑 살기 싫어. 어찌나 무례하고 더러운지. 저 더러운 중국년이랑 날 둘만 두겠다고?

아직도 어제 일로 심장이 아파. 심장에 무리가 간 것 같아.


이 이후로도 계속 이어졌다. 나는 15분가량 듣다가 마이떼 문 좀 닫아줄래? 라고 말했고, 룰리는 건방진년, 어디서 내가 말하는데 그따위로 말해? 여기 멕시코야. 나이 든 사람을 공경해야 한다고. 너 당장 내가 경찰 부를 거야.


그리고 정말로 두 시간 지나서 룰리는 우리 집 초인종을 미친듯이 두드렸다. 자신의 변호사와 함께였다. 뭐 변호사인지 아닌지도 모르겠지만. 자신의 사촌이라는 한 할아버지와 함께 왔다. 눈이 뒤집힌 룰리는 변호사한테도 닥쳐! 내가 말하는 대로 그대로 전해! 닥쳐, 너는 얘기하지 마, 라고 반복했다.


이미 모든 상황에 지쳤고 진이 빠져 눈물만 났다. 멕시코시티에는 한국인들이 모여 만든 시민경찰대가 있다. 그 상황에서 나는 그 분들께 전화를 걸었고, 담당 변호사 분이 룰리의 변호사와 함께 얘기하자 그들은 바로 집을 나갔다. 정말 법대로 한다면, 집주인 허락 없이 무단 침입해 소파에 앉아있는 그들은 범법을 저지른 것이다. 룰리는 우리가 언제 무단으로 들어왔냐며, 네가 문 열어준게 아니냐며 소리를 질렀지만, 변호사가 급하게 데리고 나갔다.


룰리는 입버릇처럼 너는 여기서 혼자고, 나는 내 나라에서 보호받는 사람이다, 라고 말했다. 나는 그 전화로 신기하게도 혼자가 아니게 되었다. 뒤에 든든한 누군가가 있었다.


사실 이 일은 회사를 그만두는 기폭제가 되었다. 룰리가 협박할 때 입버릇처럼 말하던 경찰 출동은 당시 상황에서 가장 피해야 할 일이었다. 경찰을 부르면 내가 추방될 수도 있었다. 회사에서 근무한 지 약 1년여의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 취업비자가 없었다. 취업 조건에 비자는 지원한다고 했지만, 후에 대표는 내가 지속해서 건의하자 내가 당신 비자 해주는 사람입니까?라고 되물었다.


그게, 사람이, 당장 앞일이 두려워서 눈 감고 산 지 일 년정도 지나니까 이런 일이 벌어졌다. 아니다 싶을 때 나가는 것도 용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그만뒀다.


신기하게도 일을 그만두고 더 나은 일을 찾았다. 신변보호가 되는 취업비자도 나왔다. 은행계좌도 만들었다.


룰리는 그 이후에도 비슷한 일을 반복했다. 시장에 가려고 장바구니를 들고 집을 나서거나 자전거를 끌고 나오면 나시 하나만 입고 뛰쳐나와 어디 가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너 렌트비 내는 날이 언제인지 알지?하고 물었다. 마지막 달은 처음 계약할 때 냈던 보증금으로 상쇄하는데 3주 전부터 우리 집에 들어와 모든 가구를 점검하고, 파손 정도에 따른 돈을 청구하겠다고 강조했다. 당신이 걱정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고, 청소비는 계약서에 없지만 내고 가겠다고 말했다. 나는 다른 곳에 직장을 구했기 때문에 예정보다 이르게 집을 나왔다.


막판에는 룰리가 너무 무서워서 손이 벌벌 떨렸다. 짐을 옮길 때도 우버 기사에게 친구인척 짐을 같이 옮겨달라고 말했다. 자전거는 마이떼 친구인 아르헨티나 남자애의 도움을 받았다. 룰리는 창문에 붙어서 그 과정들을 보고 있었다. 애써 무시하고 나왔다. 이제 다 됐다.


작가의 이전글 10월 가뿐한 편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