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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서리 Jul 22. 2020

결국, 빨래를 집어던지고 말았다.

남편은 이 세상 포커페이스가 가장 안 되는 사람이다.


나이가 오십 대 중반이나 되었으면

좋아도 무덤덤, 마음에 안 들어도 그냥 그런가 보다 라는 표정으로 자기 자신을 다 드러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러나 남편은 나의 바람과는 다른 성향을 지니고 있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 상황이나 불편한 자리일 때는 마치 장난감 안 사줘서 울다 심통 난 아들내미처럼 눈도 안 마주치고, 웃지도 않고, 말도 안 하고,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그렇게 앉아있다. 주변 사람들이 불편하거나 말거나.


남편은 그날도 그랬다.

미국에 사는 오빠가 한국에 들어와서 2주일간의 코로나 격리를 끝내고 오랜만에 형제자매들이 모이는 자리였다.


미국에 오빠네 가족이 산다. 오빠가 미국에 산 지 40년이 되어가니 오빠는 그냥 미국 사람이다. 오빠가 일 때문에 한국에 1 년에 두세 번 정도 나오면 우리 가족은 함께 식사한다. 보통은 아빠, 엄마와도 함께 식사하지만, 간혹 오빠, 언니와 형부, 나와 남편 이렇게 다섯 명이 호프집이나 삼겹살집에서 소주 한잔 기울이는 경우가 많다.


사실, 가족이라는 관계 때문에 종종 모이지만, 우린 서로에 대해 잘 모를 수도 있다. 그리고 너무 샅샅이 물어보면 불편할 수도 있다. 어쩌면 친구에게는 울며불며 바닥까지 말할 수 있는 자신의 이야기를 가족에게는 예쁜 부분만을 얘기하고, 그것만을 받아들이고 싶은 적도 많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가족을 지탱할 수 있는 힘일 수도 있다.


사실, 별로 아는 건 없지만 우리는 가족이다.


시작된 이야기의 화젯거리는 언니네와 오빠네 아들딸 얘기였다. 언니네 아들은 8월에 군대를, 딸은 미국 유학을 가게 되었다. 오빠네 딸은 댈라스의 대학원을, 아들은 시애틀의 대학교를 들어가는 시기였다.

우리는 1차에서 삼겹살을, 2차에서는 치맥을 했다.

3시간 내내 자식들 이야기뿐이었다.


나와 남편은 듣고 있었다. 아무런 할 이야기가 없었다.


사실 1년 몇 번 번 만나는 형제자매들 또는 부모가 동석해도 이야기의 주제는 별 다를 게 없다. 가족끼리 모여서 정치, 경제를 논할 수도 없고, 잘 지내느냐, 일은 잘되냐, 식구들 건강하냐 는 이야기를 하고 나면 그 외는 고기 굽는 일밖에 할 게 없다. 그럴 땐 자식들 이야기가 윤활유가 되는 건 확실하긴 하다.


막냇동생이 늦게 결혼해서 회사까지 때려치우고 5년 내내 시험관 아기 시도하다가 얼마 전에 그것도 포기하고 아직 마음이 아주 힘들어하고 있는데,

그냥 그들은 자식들 이야기뿐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그 집 아들이 잘생겼네, 여자 친구가 예쁘네, 딸내미가 공부를 잘하네, 미국 오면 오빠네 꼭 오라고 해라, 서로서로 용돈들을 두둑이 챙겨주고 또 덕담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내 형제 자매지만 나도 그만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이 모임이 불편해진 지 이미 오래되었다.


이 모임에 참석하지 않는 방법도 생각해본 적 있다. 어디 멀리 가서 나와 남편만 둘이 사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족에게 모든 걸 솔직하게 털어놓고, 제발 내 앞에서는 자식들 이야기하지 말라는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1차부터 남편의 얼굴은 이미 굳어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상대방에게 눈도 안 마주치고, 듣지도 않는 거 같고, 그냥 가끔 맥주만 홀짝이고 있었다. 나 역시 듣기 싫었지만 그렇게 있는 남편이 마음에 안 들었다. 나는 그냥 예의상 웃음 짓고, 맞장구치고, 별로 궁금하지 않은데 조카들 이야기를 물어보고 있었다. 그냥 남편도 나같이 그 자리가 좀 불편해도 그 자리에선 밝은 척하는 것을 난 원했던 거 같다.


3차를 하자는 오빠와 언니를 뿌리치고 나와 남편은 집을 향해 종종걸음을 했다.

둘 다 아무 말 없이 집까지 40분을 걸어왔다.


맥주 한잔을 더하자는 남편은 나를 앞에 두고는 속상한 마음을 드러냈다.

형님과 처형네는 아들딸 다 있고, 애들 다 대학교 보내고, 두 집 다 사업 잘되는 거 같고, 매번 좋은 데 가서 맛있는 거 먹는 거 같고, 부족함도 없는 거 같고, 시장도 백화점 가서 보고, 골프도 치러 다니고…

우린 상황도 안 좋고, 애도 없고, 형편도 그런데, 꼭 우리 앞에서 그렇게 티 내고 애들 자랑을 3시간씩이나 해야겠냐고, 좀 너무들 하신 거 아니냐고..


빨래를 개다가 결국, 난 남편을 향해 빨래를 집어던지고 말았다.


“그만하라고!! 언제까지 그렇게 비교하면서 살 거야? 당신 뭐 열등감 있어? 그들이 어떻게 사는지 우리가 어떻게 다 알아? 앞으로 가족 모임 할 때마다 매번 당신은 이렇게 심통 내고, 난 당신한테 매번 화내고 이럴 거야? 그럼 가족 모임 앞으로 나가지 마? 누가 당신한테 늦게 결혼하래? 나 말고 다른 여자랑 일찍 결혼했었으면 애도 이미 낳았을 거 아냐!!”


아뿔싸, 난 결국 하지 말아야 할 말들까지 쏟아내고 나서야 이 적막이 끝났다.


난 휴지 한 통을 다 쓰도록 울다 잠들었고,

아침에 일어나니 어제 집어던진 빨래는 고이 개켜 있었다.


그렇게 우린 지옥 같은 며칠을 보냈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사실은 남편이 나에게 한 넋두리는 내가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과연 몇 번의 가족 모임을 더 해야 이 관계를 받아들이고, 마음이 넓어지는 편안함을 얻을 수 있을까? 우린 언제쯤 쿨해질 수 있을까?


우리 둘 다 아직 어른이 되긴 멀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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