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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서리 Jul 15. 2020

디자이너 나이 오십 세가 되면 참신함이 사라지나요?

중년의 디자이너

저희 회사는 그동안의 경험보다 실제 업무에서의 가능성과 다양성, 그리고 참신성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경력직의 우대와 차별은 무관합니다.

다니던 대기업 디자인그룹을 퇴사하고, 몇 년 동안 임신을 위해 발버둥 치다가 그것마저 포기하고는 절대적 후회를 하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꾸역꾸역 회사에 버티고 있을걸.’ 


그 후 다시 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리 쉽진 않았다. 

나이는 이미 오십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기업을 다녔다는 이유로 나에겐 작고 하찮은 일들은 다들 주지 않았다.(난 사실 아무 상관없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는데 말이지.) 손가락이 팔팔 나는 이십 대의 디자이너에 비해 나는 기획력과 공간 브랜딩은 자신 있었지만 프로그램 응용 능력은 그들보다 덜했기 때문이었다. 경력은 투머치이고 나이가 나이인 만큼 다시 어느 직장을 들어가기도 쉽진 않았다. 


그럴 때 즈음, 나의 눈에 들어오는 작은 회사가 하나 있었다. 대학 건축과 동기 세명이 함께 운영하는 건축디자인 스튜디오였고, 그들은 서촌을 중심으로 작은 한옥들을 숙박시설로 리모델링하는 사업을 하는 회사였다. 솔직함을 담아 구구절절 에세이를 보냈다. 나는 디자인 철학과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그 회사에 시니어 인턴을 제안했다.



비록 생명체가 없는 무생물이라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수명이 있습니다. 깨어지는 순간까지가 유리의 생명인 것처럼. 중국 속담에, ‘비단은 500년의 생명력이 있고, 종이는 1000년을 견딜 수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물며 사람이 살아가며 번성할 수 있는 ’ 공간’의 수명은 과연 얼마나 될까요?


이성계가 조선 건국을 위해 한양을 결정하기 전인 1394년에 무학대사를 만나 ‘십리를 더 가라’는 말을 들었으니, 아마도 왕십리의 역사는 적어도 620년은 넘었을 것입니다. 저는 그런 왕십리에서 태어나고 성장할 때까지 살았습니다. 집 앞 재래시장에서는 매일 상인들과 손님들의 흥정 소리, 생선과 야채 냄새들, 복잡하고 좁은 골목길의 느낌으로 가득했던 동네도, 세월이 지나면서 쉽게 허물어지고 빠르게 세워지는, 매일 멋들어지게 개발되는 모습들을 보고 자랐습니다. 그런 환경 안에서 저는 공간 디자이너가 되었으며, 이러한 두 가지의 대립된 상황, 즉 ‘old vs. new’는 나의 ‘관찰’과 ‘생각’을 더욱 독특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호기심과 실험정신, 그리고 광범위한 관계성의 중요성을 일찍 깨달았기에, 독일 비스바덴의 Design Workshop, 덴마크 코펜하겐의 ‘Furniture Design in Scandinavia’, 뉴욕 Pratt Institute에서의 다양한 배움인 input이 있었습니다. 그에 대비, 실무에서의 output은 인테리어 회사에서의 디자인·시공·공무, 대기업에서의 디자인 디렉터, 디자인대학 인테리어 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침으로서 더 많은 배움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이 바로, 귀사가 ‘시니어 인턴’을 도입해 볼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명 ‘시니어 인턴’ 제도가 낯설고 불편하게 느껴지겠지만, 반드시 사회초년생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인턴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실무 경험은 충분하지만 다시 겸허함을 갖춘 시니어 인턴을 채용하는 시도를 해봄으로써, 귀사가 처음 걱정했던 모험은 분명 회사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저는 공간의 ‘보존’과 ‘재사용’의 가치, 범위, 방향성에 대해 연구하는 것을 선호하며, ‘RE’라는 콘셉트를 발전시키고 이해하는데 매우 강한 의지력을 가지고 있습니다.(‘RE’ : renewal, revival, remake, reveal, restore, reform 등) 저는 이것이 우리의 현재와 미래, 그리고 사람들이 사용하는 공간을 지속적으로 유지시켜주는 가장 중요한 이슈라고 생각하며, 만일 제게 행운이 주어져서 귀사와 함께 할 수 있게 된다면, 저의 경험과 관찰력을 활용하여 ‘RE-consideration’과 ‘개인의 역사적 이야기가 담긴’ 공간을 만들 예정입니다. 또한 귀사의 대표님들의 철학과 가치관을 존중하며 제가 생각하는 방식과의 유사점과 교차점을 발견하였으며 분명 긍정적인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것입니다.


저는 20년 이상의 인테리어 디자인 필드에서 경험이 있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심미적 감성을 발전시켰습니다. 또한 다음의 프로그램의 운영이 가능합니다 : Micro Soft Office Suite, Adobe Creative CS6, Autodesk, SketchUp. 제가 가진 모든 기능들은 문제 해결 능력과 사람들과의 관계성을 위해 써집니다. 그러나 저의 가장 중요한 자산은 ‘열정’ 그리고 ‘공감 능력’입니다. 만일 제가 과거에만 집중하는 사람이었다면 역사학자가 되었을 겁니다. 만일 제가 현재 인간의 조건만을 고려하는 성향이었다면 아마 인류학자가 되었을 겁니다. 그러나 미래의 공간, 시간, 그리고 사람의 가치를 알았기에 공간 디자이너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시니어 인턴으로 함께 하고 싶은 이유입니다.



인상 깊게 봤던 영화 인턴(The Intern, 2015, 앤 해서웨이 / 로버트 드니로 주연)과 같이, 시니어 인턴 제도는 나에게 다시 새로운 시작을 이끌어 줄 수 있으리라 기대했었다.

그러나 단 한 번의 메일로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경력은 중요하지 않다는 대답이었다. 

가능성과 다양성, 그리고 참신성이 더욱 중요하게 본다는 말이었다. 


- 디자인 바닥에서 아등바등 버티며 경력을 쌓으려고 그리 노력했는데 어떤 경력인지 알지도 못한 채 그냥 뭉뚱그려 ‘경력’이 중요치 않다고?


- 경력이 많으면 가능성과 다양성이 없어지나? 


- 디자이너 나이가 오십 세가 되면 참신성은 사라지게 될까? 


특히나 내 눈에 띄었던 문구는 바로 ‘참신성’이었다.


산업디자이너의 아버지, 미니멀 디자인의 거장이며 독일 브랜드 브라운의 수석 디자이너인 디터 람스(Dieter Rams)는 현재 나이 88세인데도 여전히 그의 철학이 녹여진, 애플의 조너선 아이브 마저도 그의 디자인을 샘플링할 정도로 왕성한, 참신한 디자인 활동 중이다.

디터 람스(Dieter Rams)와 그의 작업들


그래픽 디자이너의 거장인 밀턴 글레이저(Milton Glaser)는 47세의 나이에 세계적인 그래픽인 I ♥ NY을 만들어내어 전 세계 관광객들에게 뉴욕 머그 컵을 선물했다. 그는 중년에 참신함이 빛났다.

밀턴 글레이저(Milton Glaser)의 I ♥ NY 그래픽


한국 최고의 건축가인 김수근 건축가는 향년 55세 이른 나이에 타계하셨지만, 최고의 작품 중 하나인 경동 교회를 남겼다. 그의 나이 50 세였다.

김수근 건축가의 '경동교회'


나의 실력을 세계적 거장들의 작품 활동과 비견할 수 없겠지만, 나이가 오십 세이며 경력이 많은 디자이너에게 다양성과 가능성, 그리고 참신성을 이유로 거절당한 지금의 현실에 나 역시 뼈저리게 통감하며 그동안 나의 디자인 인생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대기업에 다닐 당시, 지원한 디자이너들을 면접할 기회가 있었다. 먼저 이력서와 에세이를 보고, 제출한 포트폴리오로 1차 통과를 결정한다. 내 눈은 이미 그들의 생년 즉 나이에 머물러 있었다. 

‘나이가 우리 회사 책임급 보다 많은데, 경력은 선임급이네.’ 또는 그 반대로, 나이는 어린데 너무 많은 경력도 역시 탈락의 이유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들의 탈락 요건은 나이와 경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의 선입견이었던 것이다. 


그 엄청난 선입견으로 인해 그때 놓쳤던, 어쩌면 더 훌륭하게 디자인 업무를 수행했을 탈락자들을 생각한다. 내가 그 입장이 되어 보니 이제야 그 마음을 이해한다.


디자이너가 나이를 먹었다고 참신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디자이너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생각이 선입견으로 뒤덮여서 참신성을 관찰하지 못했을 뿐이다.


쉽진 않겠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선입견을 고쳐보려 한다. 그리고 중년이 넘어가는 디자이너인 나는 참신한 도전을 계속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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