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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서리 Aug 07. 2020

어떤 디자인으로 할 건지 다수결로 결정합시다!

어떤 디자인으로 할 건지 다수결로 결정합시다!


회사에서 샐러드 뷔페 외식 브랜드를 하나 런칭하기로 결정했다.


한참 저가 샐러드 뷔페 ‘애슐리’가 시장을 장악하고 있을 때라 타깃은 확실했다. 각 기업에서 비슷한 브랜드들을 하나씩 내놓고 있던 터라 경쟁사 대비하여 그노무 차별화 전략 때문에 마케팅그룹에서는 비상사태로 몇 주일을 밤새고 있었다. 메뉴 ENG 그룹에서는 단가, 구매 물품, 식자재, 인력원 등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조리 아카데미 그룹에서는 메뉴 ENG 그룹에서 나온 데이터를 갖고 분야별 셰프들이 레시피 작업과 알파, 베타 시음 테스트를 진행하였다.


어떻게 된 게 맨날 TF야.

(Task Force:기업에서 비상사태일 때 구성하는 일종의 프로젝트팀)


디자인그룹도 비상이었다.


3개월 만에 외식 브랜드 하나를 런칭해서 오픈까지 하라니.

게다가 규칙, 규범, 제약도 많고 뭐 하나 잘못하면 매번 뉴스에 이슈가 많았기에 늘 일하고 발표하기가 조심스러웠다.


언제나 그렇듯이, 협업하는 그룹에서 이미 날짜를 까먹기 시작했다. 


거꾸로 계산했다.

오픈까지 두 달, 8주일 남았다.

시공 4주일 잡고, 오픈 오퍼레이팅 기간 1주일.


8주 - 5주 = 3주일 남았다.


BI(Brand Identity), 로고, 인테리어 기획/기본/실시설계/ 현장 설명회/비교 견적/협력사 선정/그래픽 디자인/애플리케이션 개발/유니폼 디자인까지 3주일 안에 다 해야 한다. 게다가 팀장, 상무, 전무, 대표이사 보고까지 사이사이 막 껴 넣어야 한다.


또 널뛰겠군.

회의를 시작했다.

담당자들이 난리다.

‘진정해라, 얘들아. 나두 죽겠다…’


일단 1호점 오픈을 목표로 했고, 마케팅 그룹에서 브랜드명과 콘셉트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시작하면 오픈 기간을 못 맞추니, 대표이사에게 보고한 브랜드 기획안만으로 디자인을 진행하기로 했다.


진행한 지 한 달쯤 지났을 때 인사팀장에게 전화가 왔다.

디자인그룹이 전체 그룹 중 제일 야근이 많은데 근래 더하다고. 이러다가 디자인그룹 점수가 안 좋아질 수 있다고 살짝 협박하셨다. 근무시간에만 일할 수 있도록 직원들 교육을 하란다.

“네, 알겠습니다.”(깔깔 웃었다. 속으로)

‘니가 그렇게 해보세요…’


디자인그룹 입장에서 상부에 디자인 보고하는 것은 일종의 수명 단축 행위다. 


보고 후 제안이 변경되면 아래 직원들은 다시 삽질을 시작해야 하고, 그러면 오픈을 못 맞춘다. 때문에, 보고자인 그룹장은 최대한 변경 없이 진행하기 위해 내부 보고를 잘해야 한다. 결국 윗분들 마음에 들게 하기 위해 이게 왜 이렇게 되었는지 설득을 잘해야 한다.

보고 후 내려온 나의 표정으로 직원들은 생사가 갈린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얼굴에 드러나는 만연의 웃음은 디자이너들에게 들키고 만다.

나는 다행히 보고에서 변경된 경우가 드물었다.

한때는 ‘김피티’라는 별명도 있었다.


외식 브랜드 오픈 프로젝트는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이미 시공할 협력사가 선정되었고, 이젠 변경이고 뭐고 그냥 ‘고’였다.

그날은 브랜드 BI, 로고, 인테리어 디자인 콘셉트와 디자인을 팀장님께 보고하는 회의 자리였다. 딱 두 달짜리 긴급 프로젝트의 디자인은 파트장만 3명, 디자이너 6명, 시공 기술자 3명이 매달려있었다. 벤치마킹, 스토리, SWAT 분석(강점, 약점, 기회, 위협 분석), 환경 분석, 사례조사, 가능한 대안만 100개는 넘게 스터디한 후 나온 디자인 제안이었다. 너무 많은 대안이 있으면 말이 많아질까 봐 A 안과 B 안 2개만 준비했다.


디자인그룹 입장에서는 A 안을 선택해야 한다.


“난 B 안이 좋은데!!!”


밑도 끝도 없이 팀장님의 허를 찌르는 말에 회의에 참석하는 디자이너들은 얼음이 되었다.


“아, 팀장님. 이건 이렇고 저렇고, 이건 이래서 스터디를 해본 결과, 어쩌고 저쩌고…”


“아, 그래?” 그래도 난 그냥 B 안이 좋은데. B 안이 더 이쁜데?”


이쁘다고? 그냥 이쁘다고?
팀장님, 디자인이 니 눈에 이쁘다고 결정되는 게 아니거든요.


“그럼 어떤 디자인으로 할 건지 다수결로 결정합시다! 사무실에 있는 상품개발과 상품기획 직원들 다들 와보라고 해. 투표하라고!”


“어! A 안이 제일 많네. 난 B 안이 좋은데.. 김 그룹장, B 안을 좀 더 A 안처럼 디벨롭시켜봐.”


이미 ‘답정너’였다.


세상에서 제일 싫은 결론이다.

B 안을 A 안처럼 디벨롭시켜라!

A 안도 B 안도 아닌 비열한 결론이다.

결국은 책임 회피하는 결론이었다.


대체 이 프로젝트를 위해 ‘세계의 음식과 디자인’의 역사부터 시작된 스터디로 오늘까지 얼마나 치열한 분석에 의한 디자인이 나왔는데, 고작 팀장의 개인적 취향과 내용을 전혀 알지 못하는 막 불려 온 다른 그룹의 다수결로 디자인이 결정되어야 한다니…


치욕스러웠다. 디자이너들에게 면목이 없었다.


회의가 끝났고, 담당자, 디자이너들, 기술자들이 모였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다시 해요? 아니면 B를 A로 디벨롭시켜요?”


“뭔 소리야! 걍 가! 그냥 가자고! 시간 없다. 빨리 작업하자.”


끝은 뻔하다.


둘 중 하나로 결론이 나겠군.

1)    매출이 안 좋으면 디자인이 잘못되어서 그렇다고 할 거다

2)    그게 아니면 이번 평가에서 팀장님께 점수받긴 글렀군


그렇게 고단한 디자인그룹의 김굽장의 하루는 평가점수를 건 투쟁으로 종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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