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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서리 Oct 15. 2020

한계가 창의성을 만든다

청담동에서 메이크업 아티스트 하는 친한 동생이 있다. 이미 20년 이상을 청담동 바닥에서 일했으니 날고 길 만하다. 내가 마흔다섯에 결혼했으니 이미 꽃다운 나이는 지났겠으나, 당시 ‘화장발’로 나를 꽃신부로 변신시켜줄 정도였다. 결혼식 날 그 친구가 한 말이 있다. “언니, 리마인드 웨딩 할 때 한번 더 메이크업 끼깔나게 해줄게. 최수종 하희라만 리마인드 웨딩 하는 거 아냐.”

연예인, 아이돌은 물론이고 제시와 비, 이영자가 주요 고객이다. 매일 새벽부터 메이크업 스케줄 때문에 정신없이 바쁜 친구가, ‘놀면 뭐하니?’ 예능 방송 때문에 비와 제시가 다시 화제가 되어 요즘은 더 바쁘다고 했다.


그런 그녀가 피치 못한 사정으로 청담동에 갑작스럽게 본인의 헤어 & 메이크업 샵을 차리게 되었다. 느닷없이 연락 온 그 동생은, “언니, 나 인테리어 해줄 거지?”라며 시간은 2주일밖에 없고 준비는 하나도 안되어 있고, 돈도 한 푼도 없는데 막무가내로 인테리어를 해달라고 했다.


가지고 있는 돈을 탈탈 털고, 은행 대출은 끝까지 받았고, 가게 임대보증금, 월세 낼 돈, 직원 월급, 헤어와 메이크업에 필요한 장비와 의자, 헤어 기구들 살 돈 빼고, 로고 디자인과 웹사이트 디자인비 빼고 기타 등등 제반 비용을 빼고 남은 돈이라고 나에게 들이민다.


‘왜 모든 고객들은 자기들이 필요한 돈을 전부 빼고 남은 돈으로 인테리어를 해달라고 할까? 인테리어 비용을 먼저 손가락으로 꼽고 시작하는 고객은 본 적이 없다.’


“싸고 예쁘게 해 주세요!”


라는 말을 천만 번쯤은 듣고 산 거 같다. 그 말을 친한 동생에게까지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임대 계약했다는 청담동 공간을 가봤다. 먼저 임차인은 그 공간을 아이돌 연습실로 사용했었다고 했다. 방은 칸칸이 나뉘어 있었고, 바닥도 한 단 높이 들어 올려서 춤 연습실로 만들어 놓았고, 방들은 온통 방음벽을 설치되어 있었다. 동생이 가지고 온 돈으로는 기존 공간을 철거하고 나면 끝날 정도의 금액이었다. 그렇지만 동네가 청담동이고 연예인들이 드나드는 곳이라 예쁘게 해야 한다는 주문이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필요하다는 장비들이 늘어나고, 그만큼 돈은 점점 더 줄어들고, 인테리어에서 원하는 것들은 늘어나고 있다.


난감하네, 난감해. 한계가 턱까지 차는 기분이다.


여러 가지 옵션의 도면 설계 작업을 하다가 문득 답답할 때 보던 책을 펼쳤다.


“한계가 창의성을 만든다.”

너무 작은 대지면적, 불만족스러운 지형, 지나치게 긴 공간, 익숙하지 않은 자재, 고객의 모순된 요구 등 설계상 한계 때문에 슬퍼하지 말라. 그런 한계 속에 문제의 해결책이 있다!
가파른 경사 때문에 일반적인 건물을 세우기가 어려운가? 그렇다면 환상적인 계단과 경사로와 아트리움을 수직적으로 잘 이용한 공간을 만들어보라. 건물 앞에 추한 벽이 떡하니 있는가? 그 벽을 매우 흥미롭고 기억에 남을 남을 만한 전망 속에 포함시킬 방법을 찾아보라. 너무 좁거나 긴 대지, 건물, 방을 설계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는가? 비정상적인 비례를 흥미롭게 이용한다면 뜻밖의 성과를 얻게 될 것이다.

<건축학교에서 배운 101가지, 매튜 프레더릭 저, 동녘>


다 맞는 말이긴 한데, 지금 나에게 도움이 안 될 거 같아,

책을 덮고,

도면도 덮고,

생각도 덮기로 했다.

일단 오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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