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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서리 Feb 01. 2022

주식회사 ‘쓸모’

“오늘 장 보러 갈래?”


“주식회사 ‘오늘’!”


“무슨 소리야? 갈 거야? 말 거야?”


“주식회사 ‘무슨 소리’!”


“주식회사 ‘갈 거야 말 거야’!”


이 남자는 이상한 버릇이 있다. 대화하다가 느닷없이 내 말 앞뒤를 전부 잘라버리고, 명사나 동사 앞에 ‘주식회사’라는 단어를 붙이면서 혼자 좋아하는 거다. 


어지간히도 주식회사를 하고 싶은가 보다.


경영학 공부를 했고, 학생들에게 경영학 강의를 하고, 창업지원 프로그램 같은 정부 지원 사업도 운영해 본 사람이었다. 세월은 어쩔 수 없나 보다. 그도 나이가 들었고 젊고 실력 좋은 교수들은 넘쳐나고, 퇴직을 준비할 마음의 준비도 없이 그에게 은퇴가 와버렸다. 

나도 몇 년 전, 결국은 실패로 끝난 시험관 아기에 5년간 목을 매느라 난임 퇴직을 해버렸고, 우리는 그렇게 함께 은퇴를 맞이했다. 우리 둘은 그저 멍하게 일도 돈도 없는 삶을 살아 내었다. 있던 퇴직금을 까먹으며 대출을 받아 그저 아끼는 삶이 최선이라는 선택을 하면서. 


‘인테리어 디자인’이라는 나의 직종 때문에 간간이 크고 작은 프로젝트로 띄엄띄엄 생활비는 벌고 있었고, 지금은 작은 디자인 스튜디오 회사를 운영하는 나를 보며 그는 부러워했었다. 이유는 ‘기술직’이기 때문에 정년이나 퇴직에 상관없이 연필 들 힘만 있고 실력이 있다면 일을 시작하고 멈추는 것은 자신의 의지에 달려 있다는 거였다. 

경영학을 전공했으니, 회사 경영을 잘할 수 있는 거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학업과 실무의 길은 다르다는 것을 몸소 알아내고 있다. 여전히 그에게 창업이나 창직, 또는 스타트업 회사를 오픈하기 위해 조언을 구하는 연락이 온다. 그들에게 선하고 단비 같은 이야기를 해주고 돌아오는 남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어깨 좀 펴!”

라는 말을 하면서도 내 가슴은 내려앉는다. 한때는 경영학을 가르치는 사람이었지만, 정작 자신의 회사는 운영해보지 못한 퇴직한 선생님으로 남는 그는 어지간히 자신의 브랜드를 가져보고 싶었던 거다. 


예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나를 따르던 후배가 있었다. 가끔 그녀와 통화하면, 여전히 회사는 이렇게 저렇게 굴러가고 있다는 이야기, 꼴 보기 싫은 팀장과 전무가 아직도 독재하고 있다는 이야기 등등 함께 했던 과거 흘러간 회사 담화를 하는 게 우리의 수다였다. 그녀는 회사를 옮기지 않고 다닌 지 10년이 되었고, 그렇게 중요하지도, 또는 무용한 존재도 아닌 본인의 안정된 삶에 물들어 있는 일상이었다. 어느 날 사무실 놀러 온 그녀는 다른 회사에서 지원서를 내보라는 오퍼가 있었다고 흘러가듯이 나에게 말했다. 


“옮겨! 10년 다녔으면 옮길 때도 됐어. 지금 지원서 써서 내라!” 


MBTI 검사에서 내향성을 지닌 그녀는 백 스물한 번의 고민과 4번의 인터뷰 끝에 다른 회사의 팀장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직한 지 2주일 되던 날 그녀에게 전화가 왔다. 


“정신없이 바쁘고 아직 적응도 안 되었는데, 여기저기에서 저에게 많은 기대를 하고 있고, 너무 관심들을 가져주어서 요즘 사는 맛이 납니다. 할 일이 많다는 게 이렇게 행복한 지 몰랐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두 옥타브가 올라가 있었다. 10년 다니던 회사에서는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하던 대로 일하면 아무 문제없는 삶이었지만, 그것이 문제였다. 


매슬로우의 욕구 피라미드

매슬로우의 욕구 피라미드에서 맨 꼭대기에 위치한 ‘자아실현의 욕구’가 부족하여 그녀는 처진 어깨의 삶을 지속했었던 거다. 밥 먹고, 내 몸 하나 누울 집이 있고, 월급 나올 회사가 있고 가족과 함께 건강하게 살고 있다면 인간의 모든 욕구는 ‘최상의 만족’의 버튼인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유용성, 필요성, 가치. 소용이라는 부분은 ‘내가 과연 나와 사회에 쓸모가 있는가’에 우리는 항상 적극적인 질문을 쏟아낸다. 


몇 년 전 개봉했던 김혜수 주연의 영화 ‘차이나타운’이 생각났다. 

영화 '차이나타운'

지하철 보관함 10번에 버려져 이름이 ‘일영’(김고은)은 오직 쓸모 있는 자만이 살아남는 차이나타운에서 ‘엄마’(김혜수)라 불리는 여자를 만난다. 엄마는 일영을 비롯해 쓸모 있는 아이들을 식구로 만들어 차이나타운을 지배하며 그들에게 늘 질문을 한다. 

“증명해봐. 네가 아직 쓸모 있다는 증명.”

이 말을 들으면 오늘도 신랑은 이런 말을 할 것이다.


“주식회사 ‘쓸모’!”


오십이 넘었지만, 여전히 내 인생에서 또는 사회에서 쓸모 있는 인간이기를 바라는 나이기에 누군가가 나를 찾아주는 미세조직처럼 보이지 않을 정도의 작은 일에 오늘도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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