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스며들지 못하도록
머리 위로 눈송이가 소리없이 내려앉았다. 카페에 들어서기 전, 지수는 미처 그녀의 머리를 적시지 못한 눈을 아무렇지 않게 훌훌 털어 내며 문득 그것이 그녀의 삶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것도 스며들지 못하도록 그녀 자신이 황급히 털어내고야 마는.
문을 열고 카페에 들어서자, 캐롤이 그녀의 귀로 흘러 들어왔다. 아직 11월이지만, 눈은 내렸고 카페 안은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가득했다. 사람들이 준비가 되어 있든 되어 있지 않든,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그리고 어차피 일어날 일이라면 예상보다 일찍 일어나기도 하는 것이다.
단체석에 앉아있는 성호가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지수는 조용히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약속 시간이 되지 않아 아직 둘뿐이었다. 성호의 얼굴을 바라보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그의 표정에서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 없음을 깨달았다. 지수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눈송이가 유리창에 닿아 녹아 내리는 것을 보자 얼마 전 성호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나는 지수가 바라는 사랑을 주지 않을 거야.’
성호는 자신의 아이를 다루는 유능한 아버지처럼 말했다.
그가 그 말을 꺼냈을 때, 지수는 단지 원망만을 느꼈다. 그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것일까? 그의 말을 단순하게 받아들인다면, 그렇다. 하지만 그녀는 그 말을 곱씹을수록 혼란스러워졌다. ‘지수가 바라는 사랑’ 이라는 전제가 주는 혼란스러움.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만나기로 했던 여섯 명의 사람이 모두 모이자, 성호는 모임을 주최한 사람으로서 본인을 간단히 소개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도 돌아가며 자신을 소개하도록 요청했다. 지수의 차례가 되었을 때, 그녀 또한 아무런 특이점이 없도록 차분히 자신을 소개했다.
모임은 각자가 가져온 책을 읽고, 그 책을 바탕으로 질문을 하나 만들어 내는 식으로 진행됐다. 지수는 책장을 느리게 넘겼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남은 의문에 사로잡혀 있었다.
‘내가 바라는 사랑이 뭘까?’
모임은 이상적으로 진행되었다. 각자 읽어온 책에서 나온 질문들은 때로는 철학적이고, 때로는 실용적이었다. 다만, 지수의 마음은 점점 더 깊은 혼란 속으로 가라앉았다. 다른 사람들의 대화를 들으면서도 그녀의 머릿속은 여전히 스스로의 질문에 붙들려 있었다.
‘내가 바라는 사랑이 틀렸다면, 나는 무엇을 바꿔야 할까? 아니면 그를 떠나야만 할까?’
“지수 씨는 어떤 질문을 준비하셨어요?”
누군가 그녀를 부르자 지수는 살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모임의 시선이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성호도 그들 중 하나였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읽히지 않았지만, 어떤 무언의 기대가 담겨 있는 것만 같았다.
지수는 목을 가다듬고 가져온 책을 간략히 소개했다
“제가 읽은 책은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인데요. 현실 세계와 단절된,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가 나옵니다. 말하자면 안전하고 질서 있는 세계죠. 주인공은 그런 세계에 머물다가 벽을 뚫고 다시 현실의 세계로 나오게 됩니다. 제가 하고 싶은 질문은, 그런 세계와 현실 세계 중 어디에 머물고 싶은가, 하는 겁니다.”
지수의 말이 끝나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곧 누군가 입을 열었고, 여러 의견이 이어졌다. 지수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책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나는 어느 쪽을 선택할까.’
‘완전한 세계?’
‘아니면 불완전한 현실?’
그때 성호의 목소리가 그녀의 생각을 끊었다.
“어떤 세계를 선택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저는 벽이라는 게, 결국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해요. 이를테면 내가 옳다고 믿는 방식이나 내가 고집하는 틀 같은 거요.”
지수는 성호를 바라봤지만, 그는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말을 이어갔다.
“벽을 뚫는다는 것은 자기의 틀을 벗어난 상태에서 더 넓게 세상을 이해하게 되는 과정을 말하는 게 아닐까요?”
그의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지수에게 날카롭게 다가왔다.
눈송이가 점점 더 유리창에 닿아 녹아내렸다. 지수는 손끝으로 책장을 만지작거리다 잠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작은 다짐을 했다.
‘어떤 답을 얻든, 오늘 나는 이 질문에서 도망치지 않을 거야.’
*
2년 째 독서 모임에 참여하고 있지만 지수는 오늘 처음으로 하루키의 소설을 챙겼다. 그것은 그녀 개인적으로 지극히 의도적이고 상징적인 행위였다. 내심 정말 좋아하는 책은 피해왔던 것이다. 정말 소중한 것은 남들에게 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그녀가 쌓아온 벽이었다.
‘지수가 바라는 사랑을, 나는 주지 않을 거야.’
그 말이 지수의 마음 속 불안의 싹을 틔웠다. 사랑은 서로를 성장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녀에게는 그보다 중요한 무언가가 있었다.
지수는 가끔 자신이 성호의 삶에 어울리지 않는 조각 같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인정하는 건 그녀 자신에게 너무나 가혹했다. 그런 생각은 너무나도 나약했고, 그녀는 스스로를 강하다고 믿고 싶었다.
지수는 아침마다 침대에 누운 채로 자신을 달래야 했다. 오늘 하루를 잘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괜찮아, 잘하고 있어. 오늘 하루를 더 살아보기로 설득하고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자신의 몸을 쓰다듬었다.
몸을 일으켜 곧장 주방에 가서 물을 끓이고, 머그컵에 루이보스 티백을 하나 넣는다. 컵에 물을 부어 들고는 거실에 있는 일인용 소파에 앉는다. 따뜻한 차로 몸 구석구석을 덥히며 하루를 살아갈 힘을 되찾는다. 모든 것은 그녀의 만트라였다. 이렇게 하루를 시작하면 다시 또 괜찮아진다고.
*
모임이 끝나고, 지수와 성호는 눈이 쌓인 거리를 말없이 걸었다. 털어내지 않은 눈이 두 사람의 머리칼을 조용히 적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