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저리 헤맨 사람의 레시피
올해 초 나는 초등학생을 가르쳤다.
교실엔 눈앞에 놓인 과제에는 관심이 없고 끊임없이 친구들을 둘러보며 친구에 관해서만 이야기하는 소녀가 있었다. 소녀는 종이 위에 선을 그을까 말까 계속해서 망설이고 자기를 그리고 자기 이야기를 쓰는 일에 대해서 자신없어하는 모습을 보였다. 나는 계속해서 그 소녀의 관심을 자기 자신 앞의 과제로 돌리려 노력했다.
아홉 번의 수업이 끝나갈 때 즈음엔 심청전을 바꾸어 쓰는 과제가 있었다. 소녀는 연필을 잡고 한참을 망설이더니 자신의 몸을 바다에 던지려 뱃머리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심청이를 그다음 장면에서 탈출시켰다.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치는 심청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빙그레 웃음이 났다. 소녀는 이야기를 쓰는 두려움을 이겨내는 데에도,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쓰는 데에도 성공한 것이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야기다. 어쩌다가 심청이는 자신을 희생하고 몸을 던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을까? 심 봉사는 자기 눈을 다시 뜨게 하려고 물에 뛰어들겠다는 딸을 못 말렸을까 안 말렸을까? 아버지 눈을 뜨게 하는 일이 딸의 목숨보다 소중하다는 이야기를 이 시대의 소녀가 납득하기 어렵다는 걸 초등학교 5학년은 이야기할 수 있다.
우리는 옳다고 배운 이야기와
내 안에서 떠오르는 목소리,
최소한 두 가지의 이야기를
동시에 진행시켜 가고 있다.
초등학교 5학년이 된 소녀는 동네의 작은 속셈학원을 그만두고 큰 도로가에 위치한 종합학원에 가기 위해 버스를 탄다. 어제 막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꿈자랑 발표회에서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외국어로 연기하게 되었다. 초대받지 못한 13번째 마법사가 공주에게 건 저주를 100년 동안의 깊은 잠으로 바꾸어 주는 12번째 마법사 역이 나는 마음에 든다. 주인공의 역할은 탐이 나지만, 방추에 손가락이 좀 찔렸다고 죽거나 잠들어버리는 공주의 역할은 탐내지 않는다.
떨리는 마음으로 준비했건만, 무대 위에서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연극을 위해 선생님이 입술 위에 발라준 진홍색의 루즈가 새로 산 흰색 외투에 입술 모양으로 선명하게 찍혀버렸다. 나도 모르는 사이 용서받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것 같은 마음만이 중학교에 가 교복이 자꾸자꾸 줄어들어 몸에 맞지 않게 된 기분과 뒤섞인 채로 남아 있다.
학원을 마치고 나오자 때마침 눈앞에 도착한 버스에 소녀는 럭키라는 마음으로 폴짝 뛰어 오른다. 주머니 속에 있던 100원짜리 세 개 중 두 개를 꺼내어 요금통에 던져 넣으니 동전이 빙그르르 돌면서 하나는 앞면, 하나는 뒷면으로 떨어진다. 소녀는 좋아하는 자리의 창문을 조금 열더니 머리를 기대고 마음을 푹 놓은 채 눈을 감는다. 길을 건너서 버스를 타야 한다는 사실은 아직 의식을 향해 떠오르는 중이다.
소녀는 초등학교 5학년의 상념에 깊이 잠긴다. 단어를 끊어서 외우라는 건 도대체 무슨 말일까? 다른 친구들은 어떻게 대사를 외워온 걸까? 100년이 지나 잠에서 깼는데 아직도 열다섯 살인 공주는 엄마 아빠가 모두 떠나고 아무도 없는 성에서 깨어나 기뻤을까, 슬펐을까? 이야기는 공주가 그 뒤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다고 전한다. 학교나 학원에선 늘 거짓말 같은 이야기들을 가르쳐준다.
소녀는 생각에 푹 빠져 눈 앞을 지나치는 풍경들이 낯설다는 걸 알아채지 못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데엔 20분이면 충분한데. 나는 퍼뜩 뜬 눈을 다시 뜨고 주변을 둘러본다. 롯데월드의 마스코트 너구리가 소녀에게 손을 흔든다. 나는 놀이동산에 도착할 만큼 멀리 온 것이다. 이제 나는 엄마한테 죽었다. 소녀는 울면서 공중전화 박스로 들어가 덜덜 떨리는 마음으로 주머니에 남은 마지막 100원을 밀어 넣는다.
소녀에겐 버스나 지하철에서 뜬눈을 다시 뜨는 순간들에 대한 두 가지 가설이 있다. 하나는 다시 뜬눈에 학교에서 배운 것처럼 당신이 어디쯤 왔는지, 목적지는 어디인지 확인하게 하는 역할이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무대에 올랐는데 갑자기 도시에 정전이 일어나 더는 연기를 할 수 없게 된 상황이라는 것이다. 당신은 더 이상 연기를 계속할 수 없고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이제부터 어떤 이야기를 할지 발명해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