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우보이 되기

카우보이 탄생

by 해원

“Your outfit looks a bit too fancy for here.”

이곳에서 만나 엄마가 되어 준 루시의 말이었다. 일요일 아침 그녀의 차에 나를 태우고 함께 교회로 가던 길이었다.

당혹스러웠다. 나름 검소하게 꾸민 차림새였다. 한국 교회라면 수수하다고 할 정도였는데, 이곳에서는 그 수수함조차 과한 것이 되는 모양이었다.

미국에서 사생활이나 개인의 취향에 관심을 갖는 건 무례함이었다. 핀잔을 들을 수 있는 오지랖이었다.

그런 한 편, ‘I like your outfit’ 이라든가 ‘I love your dress’ 같은 치레말은 입에 달고 사는 사회였다. 처음에는 그게 진심인 줄 알고, 그런 칭찬을 들으면 고래처럼 기분이 좋았다.

새로 산 예쁜 옷이나 악세서리 같은 걸 착용했을 때 한국의 친구들은 솔직했다. 내게 어울리지 않으면 안 어울린다 하고, 다른 걸로 바꾸라는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미국인 친구는 그런 솔직함을 이해할 수 없어 했다. 남들에겐 아무리 흉하게 보여도 본인이 좋으면 아름다운 것인데, 왜 타인의 생각으로 상처를 주느냐고 했다.

루시도 미국인이었다. 내 차림새에 대해 본인의 느낌을 솔직히 말해 주는 걸 보면 나를 정말 특별하게 여기는

모양이었다.


예배시간 내내 다른 사람들의 차림새와 나를 비교하는 데만 신경이 쓰였다. 이곳 사람들의 차림새는 거의 한결 같았다. 청바지는 계절과 장소를 가리지 않는 남녀 공용의 옷으로 마치 피부처럼 늘상 착용하는 것이었다. 상의는 대부분 fleece (뽀글이?)로 무슨 유니폼이라도 되는 듯해 보였다. 화장을 하거나 보석으로 치장한 여성들이 거의 없다는 사실도 그날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두 명의 여성이 착용한 작은 귀고리가 그들 사치품의 전부였다. 성형수술이란 말은, 적어도 이 동네에서는 먼 나라의 동화에 지나지 않았다.

한국의 교인들은 주일에 가장 좋은 옷을 입는 것이 당연했다. 하나님 앞에 서는 예의이자 신실한 믿음의 태도처럼 여겨졌다. 예배당에 들어가면 경건하게 기도하고 조용히 예배를 준비했다. 하지만 이곳에는 그런 경건함보다는 초원같은 자연스러운 분위기였다. ‘Church Dress’라는 말도 있던데, 이 동네 사람들에겐 그런 개념 자체가 없는 듯했다. 예배당 안은 편안하고 자유로운 차림새의 사람들이 가족처럼 예배를 드렸다.

치아노 치는 폴린과 소녀들 .jpg 자락동 소녀들은 피아노와 말타기를 동시에 배우며 자란다

이곳에서 가장 fancy한 것이라면, 잘 세공된 손바닥만 한 버클과 뾰족한 카우보이 부츠, 그리고 날렵하게 구부러진 카우보이 모자일 것이다. 가격이 꽤 나가는 것들이지만 신기하게도 동네 사람들 모두가 한 두개 정도는 다 가지고 있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그랬다. 우리 한인 동포들이 장만하는 한복과 고무신 같은 것으로 여겨지지만, 추석과 설날에만 입는 한복과 달리 카우보이 복장은 수시로 걸치는 일상복이기도 했다.

나는 아직 카우보이 부츠나 모자도 없고 카우보이 벨트도 없다. 액세서리 중에 모자와 벨트와 스카프를 가장 좋아하면서도 카우보이들의 그것들은 아직 장만하지 못했다. 유난히 짧은 내 허리에 버클은 그야말로 프로 레슬러의 챔피언벨트 같았고, 각진 뒤꿈치의 뾰족코 부츠는 몹시 불편했으며, 빳빳한 질감의 유연하게 굴곡진 모자는 주먹만한 내 머리에 얹히면 몹시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나는 여전히 좀 튀고 어색한 외지인이다. 옷차림이나 생김새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문명과 멀리 떨어진 자연 속에 들어와 자연같은 사람들과 살아가면서도 아직 그들과 동화되지 못한 탓일게다. 이곳의 단순함과 느린 리듬 속에서, 나는 여전히 무엇인가를 ‘의식하며’ 살고 있었다. 잘난 듯, 교양 있는 듯, 세련되 보이고 윤기 있어 보이려는 마음으로, 어설픈 문명사회의 껍질을 아직도 완전히 벗어 버리지 못한 채로.

해마다 버리고 털어내는 고령의 나무들을 보면서도, 버려야만 새로운 잉태와 탄생이 가능하다는 진리를 나는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는 버려야 할 때라고 머리로는 얘기하면서 몸은 더 많은 것들을 들여와 쌓아놓고 있었다.

버리는 것이 아깝고, 포기하는 것이 아쉬웠다. 값나가고 예쁜 옷이 나를 고급지게 하는 것 같았고, 희미하고 가느다란 눈썹보다 굵고 또렷한 눈썹이 아름다워 보였다. 아무리 하얗게 분칠을 해도, 저들의 살색보다 어두운데, 분칠을 할수록 내 어두운 피부가 도드라지는데 말이다. 피부색에 대한 차별은 어쩌면 타고난 내 피부색을 감추려는 나 자신에 의해 더 심화되는 것은 아닐까?

말타는 작은 소녀 .jpg

말을 모는 작은 소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