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의 노란 민들레
이 지역에는 민들레가 무진장 많다. 봄이 오는가 싶으면, 참다못해 터트려진 계집아이의 폭소처럼 샛노란 미소들이 사방천지에서 한꺼번에 까르륵 터져 나왔다. 보송보송한 솜털의 노랑 병아리 떼가 일제히 물 한 모금 입에 물고 하늘 향해 부리를 쳐드는 것 같았다.
길섶이나 공터는 물론 주인이 없는 빈 집 마당과, 주인이 있어도 무심한 집 마당에는 왁자지껄 웃음을 견주는 민들레 무리들로 넘쳐났다.
그러나 노란색 인간은 나 하나뿐이었다. 몇 명의 원주민이 섞인 백인들만의 동네, 검은 피부나 노랑 피부는 나 말고 없었다.
이 집의 전 소유자도 물론 백인이었다. 근본도 모르는 유색인에게 집을 팔았다는 이유로 그에게 눈을 흘긴 주민도 있었던 것 같다. 복덕방에서 내 신원조회까지 한 것으로 보면 유색인을 거부했던 이들이 꽤 여럿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정면으로 나를 밀어내거나 으르렁거리는 사람은 없었기에 나는 그런 사실을 알 수 없었다. 작은 느낌은 있었지만 흔들릴 정도는 아니었다.
내가 이 집으로 들어올 때만 해도 마당에는 민들레가 지천이었다. 나는 그걸 캐서 데쳐도 먹고 상추에 곁들여 쌈도 싸 먹는 걸 즐겼지만, 다른 잡초들과 함께 그것을 없애는 일에 더 열심을 내야 했다. 내 하얀 이웃들이 그랬기 때문이다.
물론 이웃들은 민들레를 식탁에 올리지 않았다. 내 식탁에 오른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그들 마당의 민들레는 꽃도 아니고 야채는 더군다나 아니었다. 귀찮은 한낱 들꽃, 부지런히 캐내야 할 질긴 잡초일 뿐이었다.
어떤 백인들에게 유색인은 마당의 민들레 같은 존재였다. 잘 가꾼 잔디밭에 몰래 피는 민들레,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한 잡초 같은 존재로 여기는 것 같았다. 풀을 식탁에 올리는 원시인으로도 여기는 것 같았다.
나도 처음에는 백인인 그들을 구분할 수 없었다. 피부색은 같아도 내면의 색깔은 달라, 각각의 간격도 달라야 했다. 거리를 둬야 할 사람과 어울려야 될 사람을 알지 못했다.
내 이웃들이 텃밭의 부추와 마당의 잔디를 구분하게 될 즈음에야 나도 그들 내면의 색깔을 구분하게 되었다. 부추를 잔디와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나와 가깝다는 뜻이었다. 내 텃밭에 자주 들르는 사람들, 내가 먹는 부추에 관심을 두는 이웃이라면 간격을 좁혀도 좋을 친구가 아니겠는가 생각했다.
내 집 뒷마당은 좌우 옆집의 뒷마당과 뒷집의 앞마당이 모두 연결되어 있어 하나의 골프장처럼 넓어 보인다. 그 이웃들 중 가장 연장자는 뒷집의 데럴 씨였다. 오래전에 아내와 사별하고 싱글을 고수하는 80대 중반의 할아버지였지만, 그의 마당 잔디는 언제나 가장 젊고 싱싱한 초록을 유지했다. 전문가에게 관리를 맡기는 그의 푸른 마당은 이웃들의 마당과 확연히 구분되었다.
어느 날, 그 튼튼하고 콧대 높은 뒷집 마당의 잔디 사이에 자그마한 민들레 꽃 한 송이가 피는 것을 보았다. 숨어 있는 듯 보였지만 숨 죽인 모양새는 아니었다. 날씬한 상체를 비스듬히 옆으로 기울이고 천진한 아기의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첫 아침의 이슬방울처럼 맑고 빛나는 두려움 없는 미소였다. 제 몸통보다 훨씬 굵고 튼튼해 보이는 잔디의 어깨에 살포시 기댄 그 민들레는 잡초가 아니라 어여쁜 꽃이었다.
나는 철망 울타리에 바싹 다가앉아 민들레와 노란 눈 맞춤을 했다. 만질 수는 없었지만 잘잘한 꽃잎과 곱슬곱슬한 꽃술이 선명하게 보였다. 투명한 노란색의 눈동자에 연갈색의 속눈썹이 드리워진 모습이었다.
내 평생 수많은 민들레 꽃들을 보아왔지만 그렇게 가까운 눈 맞춤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물론 더 가까이서 보았던 꽃들은 많았다. 한송이가 아니라 한 움큼 꺾어 얼굴에 바싹 들이대고 보았던 어린 날의 민들레꽃은 무진장 많았다. 그러나 다만 보았을 뿐 속눈썹이 드리운 눈동자와 만난 적은 없었다.
그 꽃은 예뻤다. 아주 특별하게 예뻤다. 날카로운 잔디기계가 수시로 칼질을 해대고 독한 제초제가 자주 살포되는 데럴 씨네 마당, 그 무자비한 기계날과 살초제 아래서 아슬하게 피우고 지켜낸 꽃은 내 눈을 적실만큼 처연했다. 공터나 길섶에 핀 풍성한 꽃들에 비하면 턱없이 가녀리고 창백한 그 꽃은, 영락없는 한국 민들레의 모습이었다. 이 땅을 견디며 사는 나의 초상이었다.
날마다 울타리 너머의 꽃을 보았다. 그것은 녹색의 밤하늘에 홀로 뜨는 노란 별 하나였고, 노란 피부의 내 눈동자에 투영되는 생명의 환희였다. 나를 닮은 서부의 생명체였다.
잘 가꾼 잔디밭에 홀로 자리 잡은 고독한 결단력은 백인들만의 촌락에 자리 잡은 내 무모함과 닮았고, 정처 없이 떠도는 민들레 홀씨의 자유로운 영혼은 내 역마살과 흡사해 보였다.
이제 곧 하얗게 영근 생명의 동그라미에 발 빠른 바람이 실리면, 민들레는 수천 개의 홀씨가 되어 다시 길을 떠날 것이다. 무자비한 기계 날을 피해 살아남은 연약한 씨앗이 어디로 날아가 어떻게 안착할지는 이제 꽃의 의지가 아니다. 오직 바람의 방향을 결정하는 창조주의 뜻에 달려있다. 내가 이 낯선 서부의 외진 곳에서 모진 소외의 계절을 견디고 뿌리 내릴 수 있었던 게 나의 힘이 아니었듯이. 유색인이라는 차가운 시선보다 그리스도 안의 자매라는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 준 신앙의 이웃들이 나를 자락동에 안착시켰듯이.
내가 먹는 민들레나 부추를 원시인의 식단이 아닌, 신께서 주신 일용할 양식들로 존중해 주는 마음들은 그 안에 신이 존재하지 않으면 쉽지않을 일이다.
데럴 씨의 잔디밭에서 날아오른 민들레 홀씨들이 내 신앙의 이웃들 마당에 내려앉기를 소망해 본다. 피부색이라는 장벽을 넘어 믿음의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품어준 그들의 정원이라면, 가녀린 노란 민들레도 잡초가 아닌 축복의 꽃으로 자리할 수 있으리라 믿는 마음에서다.
- 자락동의 어느 봄날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