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예수님, 어제 미네소타의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당신은 또 한차례의 죽임을 당했습니다. 선한 의지로 약자를 돕던 청년에게 수차례의 총알이 난사되었다지요. 청년을 사살한 그 총탄은 2천년 전 당신을 못박은 십자가였고 옆구리를 찔렀던 로마군인의 창이었습니다. 이미 숨진 것을 알면서도 옆구리를 찌른 군인과 청년의 죽음을 확인하려고 더 많은 총알을 발사한 저들은 시대를 달리한 같은 병정들입니다.
죄 없는 아기 엄마 르네가 죽임을 당하고 겨우 17일이 지났을 뿐인데, 저들은 또 다시 같은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저들은 르네와 알렉스에게 테러범이라는 누명을 씌우려고 자신들의 모든 권력을 행사하지만, 예수님 당신은 아십니다. 그녀는 인정 받는 훌륭한 시인이며 기타연주를 좋아하는 아름다운 지성인이라는 사실을요. 사랑과 평화를 추구하던 따뜻한 어머니였다는 사실을, 주님, 당신은 잘 아십니다.
억울하게 사살당한 청년 알렉스는 세상을 떠나는 분들의 마지막 호흡을 지키던 중환자실의 간호사였습니다. 나라를 지키는 일에 생을 내 준 재향군인들의 마지막을 돌보던 숭고한 젊은이였습니다. 그런 청년에게 테러리스트라니요! 생명을 살리던 그 손에 들린 핸드폰을 총이라 우기고, 애도와 사과는 안중에도 없이, 저들의 죽음을 폄훼하고 조롱하는 저들의 광기가 공포스럽습니다.
얼음집단의 광란을 보면 2천년전에 예수님을 향하던 광란의 군중들을 상상하게 됩니다. 두 젊은 희생자에게 씌우려는 테러범 누명은 그날 예수님께 씌워졌던 가시관이며 십자가 위에 붙여졌던 팻말로 보입니다.
<유대인의 왕>
지난 9월, 현정부의 마음에 드는 청년이 사살 됐을 때의 분위기는 지금과 너무도 대조적이었습니다. 그는 순교자로 추앙받으며, 온 나라와 온 교회들이 애통함으로 그를 추모했습니다.
그는 정당이나 어느 단체가 연루된 죽음이 아니라 가치관과 사상을 달리하는 한 개인에게 총을 맞았습니다. 그리고 단 한 발의 총알에 절명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 또한 결코 있어서는 안될 비극이었기에 저도 애통하며 애도했습니다.
한편, 르네와 알렉스는 국가의 공권력에 의해 사살되었습니다. 수 차례의 총격을 받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범죄자로 몰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처형한 그 십자가를 저들에게 지우려 합니다.
나의 주 예수님, 삶과 죽음에도 등급이 있습니까?
어째서 누군가의 죽음은 순교가 되고, 누군가의 죽음은 범죄가 되어야 합니까? 환자의 맥박을 짚으며 생의 마지막을 위로하던 간호사의 손, 아이들의 미래를 노래하고 시로 써 내던 어머니의 눈빛이 어찌하여 사살당해야 할 표적이 된단 말입니까? 공평하신 당신에겐 저들도 귀한 생명들이 아니었습니까. 소명을 다하던 사랑스런 아들과 딸이 아니었습니까.
예수님, 지금 외로우십니까? 그래서 당신처럼 박해받는 유대의 왕을 자꾸 탄생시키려 하는겁니까?
얼마나 더 많은 당신이 죽고, 얼마나 더 많은 유대의 왕이 생겨나야 이 참극이 끝난 답니까?
세상을 지배하고싶은 현대판 제사장은 예수의 이름으로 살인을 축복하며, 자신의 범죄를 더 큰 범죄로 덮으려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갈수록 도를 더하던 그의 범죄는 이제 새로운 종교로 탄생되었습니다. 살인을 부추기는 제사장의 목소리는 날마다 높아지고 신도들의 충성심도 커져만 갑니다.
총칼로 무장한 신도들에게 완장이 채워지고 살인할 권리도 부여되었습니다. 완장을 찬 신도들의 눈에는 더 이상 사람의 얼굴이 보이지 않습니다. 권력이 주입한 증오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제 이웃의 숨통을 끊으면서도 그것이 신을 위한 공의라고 주장합니다.
과거 등소평의 홍위병이 그랬고 나치의 게슈타포가 그랬듯이, 미국의 거리에는 지금 완장 찬 얼음병정들이 법과 질서를 동사시키며 인간사냥을 합니다. 저들의 만행이 절대적 정의라고 믿어 찬양하는 가엾은 노예들도 그만큼 많습니다. 노인과 아이들 사냥도 서슴치않는 차가운 피의 포수들에게, 무지하고 불쌍한 노예들은 좋아라 박수 치며 정성껏 모은 헌물을 바칩니다.
사랑을 가르치신 당신의 성서를 탁자위에 올려놓고, 둘러앉은 사람들에게 살인을 정당화하는 목자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스라엘의 학살을 옹호하고, 미국의 만행을 축복했습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게요?"
살상을 비판하는 성도를 향해 그렇게 말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당신께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 올리신 기도를 갈기갈기 찢어놓는 궤변이었습니다. 매주 이마를 맞대고 둘러앉아 당신의 사랑을 이야기하던 그 식탁은, 당신의 살과 피를 나누는 성찬의 자리가 아니라 더 많은 십자가를 양산하는 빌라도의 법정이 되었습니다. ‘예수를 처형하라!’ 외치는 공범이 될 것 같았습니다.
“나의 예수님은 살인한 적 없습니다. 사랑하고 용서하라 하셨지, 죽이고 복수하라 가르친 적 없습니다.”
성도는 그 말 밖에 하지 못했습니다. 두려웠습니다.
사실 이 글을 쓰는 것도 몹시 두렵습니다. 우선적 타겟이 되는 유색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두려움에 웅크리는 현실이 너무 참담합니다. 하지만 생명을 살리고 사랑을 노래하던 희생자들의 선한 얼굴이 떠오르며, 진실을 외면하고 침묵하는 나 자신이 더 큰 두려움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닫았던 기기를 열고 다시 자판을 두둘깁니다.
예수님, 저는 요즈음 성전에서 당신을 뵐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 죄악의 소리에 귀가 멀고 슬픔의 눈물에 시야가 흐려진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미네소타의 차가운 보도블록 위에 쓰러진 당신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완장을 찬 저들의 총구 앞에 쓰러진 알렉스의 정의로운 얼굴에, 르네와 주변사람들의 처절한 비명 속에 당신이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무릎을 꿇고, 몇 번이고 당신을 불렀습니다.
사랑하는 예수님, 공평하신 하나님.
저들이 부르는 하나님도 내가 믿고 섬기는 당신인가요?
사랑과 용서를 가르치시는 나의 예수님과, 완장을 채우고 총칼을 쥐여주는 저들의 예수님이 같은 하나님이신가요?
아닙니다. 절대 아니라 믿고 싶습니다. 저들의 예수는 권력의 완장위에 군림하며 죄를 부추기지만, 나의 예수님은 이 순간에도 차가운 길위에서 사살당하시고, 피 흐르는 가슴으로 작은자들을 위해 울고 계시는 사랑의 신이십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그렇게만 믿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