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같이 살다간 그들 2025

2010년 아트바스, 가을호 _구본주 · 박이소 · 이향미 · 손성완

by kim hojin

한국 미술계에서 활동한 지도 어느덧 20여 년이 되었다. 아주 젊었던 20대 초중반 시절 나는 많은 작가들을 만났고, 전시를 기획했으며, 그들과 좋은 관계로 지냈었다. 최근 한 대가 예술인의 장례식장에서 오랜만에 그 시절의 동료들을 마주했다. 그들의 깊어진 눈가와 허리를 반쯤 굽힌 몸을 보며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지 실감했다. 나는 2년 전 희귀암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었다. 생존을 넘어서 내 삶의 무게와 예술을 되돌아보게 되었고, 그렇게 나의 감정과 작업, 기억의 흐름들을 다시 더듬기 시작했다. 그 시간 속에서 문득 오래전 한 글이 떠올랐다. 16년 전, 내가 미술전문지 기자로 일하던 시절 썼던 원고.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작업으로 여전히 살아 있는 네 명의 예술가들에 대한 기록이었다. 그들이 남긴 것은 이름이 아니라 작품이고 감정이고 삶의 방식이었다. 권진규는 조각 앞에서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손을 거친 흙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살아 있다. 유재하, 김광석, 이상. 이름만 들어도 그들이 떠난 자리에 남긴 여백이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짧은 생의 끝에서 예술은 어떤 방식으로든 계속되고 있었다. 나는 그 글을 지금 다시 꺼낸다. 완전히 새롭게 쓰기보다 그때의 감정과 시선을 되살려 이 플랫폼에 다시 기록하고자 한다. 그 시절의 문장이 지금의 내 삶과 겹쳐지는 자리에서, 나는 다시 그들의 이름을 부른다.


리얼리스트 구본주, 그의 사회학

구본주 Mr.Lee, 1995

삐쩍 마른 사내가 길게 목을 내밀고 달려간다. 어딘가로 쫓기듯 하지만 어쩌면 그는 그저 살아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구본주의 조각 <Mr. Lee> 시리즈는 단지 희화된 인물이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 누구나 겪는 무기력과 단절을 형상화한 조각이다. 웃고 있지만 결코 웃을 수 없는 얼굴. 뒤틀린 자세와 왜곡된 몸짓 속에 담긴 현실. 구본주는 1967년 포천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한 조각가였다. 그는 민중미술의 흐름 안에서 조각이 시대를 어떻게 끌어안을 수 있는지를 실험해왔다. 그의 초기 대표작 <갑오농민전쟁> 연작은 과거의 기록이 아닌 현재의 질문이었다. 그는 말했다. 혁명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시작된다고. 삶을 바꾸는 것은 구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의 각성이기도 하다고. 구본주는 조각으로 말했고 그는 말보다 조각을 믿었다.

구본주 갑오농민전쟁

1990년대 이후 그의 작업은 점점 도시의 일상과 사회 구조로 시선을 옮겨왔다. 샐러리맨의 뒤틀린 어깨와 휘어진 척추는 단지 노동의 피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전체가 얼마나 흔들리고 있는지를 드러냈다. 그는 사회 비판적인 감수성을 블랙코미디처럼 풀어내면서 현실을 차갑게 바라보았다. 그의 조각은 무겁고 진지하지만 동시에 어딘가 슬프고 웃기다. 웃기다 못해 비극이 되는 삶의 풍경들. <아빠의 청춘>에 등장하는 중년 남성은 담배를 문 채 노상방뇨를 하고 있다. 전봇대에 기댄 그의 뒷모습은 초라하지만 낯설지 않다. 구본주는 점점 사랑과 가족이라는 키워드로 작업의 결을 확장해 갔다. 그는 삶의 비극은 거창한 데 있지 않다고 믿었다. 오히려 가장 사소한 장면에서 사람은 무너지고 다시 일어선다고 생각했다. 2003년 가을 그는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서른여섯. 장례식장에는 그의 동료와 제자들 지인들이 가득 모여 있었다. 그의 졸업논문 마지막 장엔 이렇게 적혀 있다. “바래지 않는 빛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는 당신께.” 그가 조각한 것은 단지 형상이 아니라 시대를 향한 시선이었고, 그의 조각들은 여전히 우리 곁에서 말하고 있다.


멍하게 하늘을 보다. 박이소

박이소 쓰리스타쇼 1994

ㅅ박이소의 죽음은 조용했다. 2004년 4월 28일. 그는 작업실 책상 앞에 기대어 앉은 채 세상을 떠났다. 책상 위에는 그가 좋아하던 와인 한 병과 음악이 있었다. 그는 박철호였고 박이소였으며 때로는 박모라는 이름으로 존재했다. 이름조차 불확실했던 그는 언제나 정체성이라는 질문 안에 살았다. 그는 존재 자체를 예술의 매체로 삼았다. 그는 뉴욕에서 대안공간을 운영했고 오랫동안 미국에서 이민자로 살아갔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는 사디(SADI)에서 교수로 일하며 포스트모더니즘 개념을 소개하고 새로운 실천을 모색했다. 그의 퍼포먼스는 느리고 허술하고 목적이 없었다. 검은 밥솥을 머리에 쓰고 브루클린 다리를 걷던 그의 행위는 유쾌하면서도 아프고, 낯설지만 왠지 익숙했다. 그는 이민자로서의 불안정한 정체성과 언어 문화 사이에서 발생하는 오해와 결핍을 작업으로 드러냈다. 그의 허술함은 의도된 것이었다. 완성보다는 과정에, 목적보다는 멍한 시간에, 그는 의미가 아닌 여백을 남기려 했다. 그는 번역을 했다. 외국의 미술 이론서를 한국어로 옮기며 그는 번역 자체를 하나의 미학적 작업으로 여겼다. 그에게 번역은 단지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적 질서의 재구성이었다. 완벽한 전달이 아닌 불완전한 이식. 그는 그 어긋남 속에서 새로운 감각을 읽었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늘 뭔가 빠져 있었다. 설명이 끝나지 않았고, 작가의 이름조차 흐릿했다. 박이소는 자신을 지우고 질문만 남긴 예술가였다. 그의 작업은 지금도 명확하지 않지만 그래서 오래 기억된다. 그는 끝내 해석되지 않았고, 그래서 예술사에 오래 남게 되었다.


Miserrere mei, Deus, 이향미

이향미 색자체 1978

그녀의 작품을 처음 본 건 오래전 대구의 한 소규모 전시 공간이었다. 전시장의 조용한 공기와 정제된 색의 흐름, 캔버스를 따라 흘러내리는 물감의 궤적은 단순히 시각적인 경험을 넘어 감정의 결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말없이 오래 바라보게 만드는 색과 그 색에 연결된 시간들의 속성. 어쩌면 그것이 이향미가 남긴 세계였다. 그는 서울예고를 거쳐 홍익대학교, 효성여대, 미국 하트퍼드 대학까지 공부하며 작업의 실험성과 순수성, 그리고 내면의 고요함을 놓치지 않았던 작가였다. 전위미술단체 <35/128>에서 활동하며 퍼포먼스와 개념미술의 실험을 거쳤지만 정작 그의 작품은 침묵과 사유에 가까웠다. 그는 말과 행동보다 작업으로 표현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작업보다 더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이향미의 대표작 <색자체> 연작은 물감이 캔버스를 따라 흐르는 행위 그 자체로 구성된다. 이 작품에서 색은 색 이상의 것을 말하지 않는다. 흘러내리는 붉음과 푸름, 어두움과 밝음은 감정의 농도처럼 보였고, 시간의 농축처럼 느껴졌다. 그는 자신의 의도를 배제하고자 했지만, 오히려 그 의도 없는 흐름 안에서 그의 삶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났다. 미국 유학 시절 가족과 떨어져 지내며 겪었던 외로움과 긴장, 내면의 갈등이 그의 작업에 스며들었다. 귀국 후 그는 사람을 거의 만나지 않았다. 시를 읽고, 신을 묵상하며, 자신의 감정과 마주했다. 1994년작 <Miserere>는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시편의 첫 구절을 제목으로 삼은 세 폭의 회화였다. 흘러내리는 색과 대조되는 밝음과 어둠의 경계는 믿음과 고통, 속죄와 기다림의 감정이 얽힌 풍경이었다. 그의 작업은 조용했지만 강렬했고, 절제되어 있었지만 지극히 감각적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이향미를 조용하고 예민한 사람이라 기억한다. 그는 농담을 잘 하지 않았고, 작품에 대해 쉽게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까이서 지켜본 이들은 그의 모든 작업이 결국 ‘사랑’에 대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타인을 향한 연민, 가족에 대한 책임, 신을 향한 헌신. 사랑은 그에게 가장 강한 감정이자, 가장 쉽게 다치게 하는 것이었다.

이명미, 내사랑 나의 누이 2009

그의 여동생인 화가 이명미는 <내 사랑 나의 누이>라는 작품에서 언니를 추억하며 보들레르의 시 한 구절을 강아지의 입을 빌려 읊게 했다. 그 그림의 배경에는 이향미의 <색자체>에서 흘러내리던 색채가 흐릿하게 녹아 있었다. 두 자매는 함께 시를 읽었고, 함께 고요한 슬픔 속에서 살아 있었다. 이향미는 조용히 작업했고 조용히 기억되었다. 그녀의 작업은 삶과 분리되지 않은 상태로, 지금도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다.


생각을 옮겨서 묘(妙)를 얻다

손성완은 직관적인 사람이었다. 감정보다 구조를 중시했고, 조형보다 사상을 먼저 바라봤다. 그는 동양화적 사유와 현대미술의 추상 사이 어딘가에 서 있었다. 그의 작업 <천상>은 중국 동진의 고개지가 말한 회화이론 ‘천상묘득’에서 제목을 따온 것이다.

손성완 '천상' 2003

형상을 따라 정신을 그리고, 생각을 옮겨 그윽함을 얻는다는 뜻. 손성완은 이 문장을 마음속에 품고 작업을 이어갔다. 그는 사물의 외형이 아니라 그 사물이 불러일으키는 감정과 에너지에 집중했다. 그의 화면에는 수묵이 흘렀고, 선이 굽이쳤으며, 여백은 숨 쉬듯 구성되었다. 하지만 그 여백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숨기고 있는 공간이었다. 그는 무를 통해 유를 드러내고, 유를 통해 무의 깊이를 확장했다. 그의 작업은 조용했고, 때로는 어두웠지만 단단했다. 돌출된 선과 번짐은 조형적인 장식이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였다. 그는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았고, 작품에 설명을 덧붙이지도 않았다. 그는 보는 이의 관조를 믿었다. 사유는 작가의 몫이 아니라 관객과의 대화에서 완성된다고 생각했다. 손성완은 짧은 기간 동안 수많은 전시를 소화했다. 국내뿐 아니라 바젤 아트페어 등 해외에서도 주목을 받았고, 자신의 표현 세계를 넓히려는 열정이 컸다. 그러나 2006년, 그는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너무 빠른 작별이었다. 손성완의 작업은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는다. 그것은 동양의 철학, 현대적 추상, 미묘한 직관, 그리고 무엇보다 그 자신만의 시선이 겹쳐진 결과였다. 그는 존재의 본질을 묻는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고, 그것은 한 사람의 삶이 사라진 이후에도 여전히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의 작업은 남아 있고, 그 질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에필로그_불꽃과 장작불의 조응

그때 나는 그들이 불꽃 같다고 생각했다. 짧고 뜨겁고 단숨에 타오르고 사라졌지만 그 불꽃은 어딘가 찬란했고 멋졌고 심지어는 숭고해 보이기도 했다. 죽음은 비극이었지만 그들의 삶은 그렇게만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들의 작업 앞에서 경외감을 느꼈고, 그 짧은 생이 만들어낸 예술의 밀도에 압도되었다. 그들은 진지했고 단단했고 위태로웠지만 분명 멋있었다. 나는 그들을 기록하며 나도 언젠가 저런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그들의 나이가 되었고, 살아남았다. 그것도 딸을 혼자 키우는 홀아비로, 암을 한 번 이겨낸 몸으로, 더 이상 불꽃같은 삶은 나의 계획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현실은 장작불처럼 오래 가야 하고, 삶은 버티는 쪽에 가깝다. 하지만 그때의 내가 감탄했던 그 불꽃 같은 삶은 지금도 내 안에 남아 있다. 지금의 나는 그 삶을 닮고 있지 않지만, 그 기억은 여전히 내게 영향을 주고 있고, 그 감정은 아직 퇴색되지 않았다. 나는 그들에게 썼지만, 이제 그 글은 나에게 되돌아온다. 그때 내가 그들에게 품었던 감탄은 결국 나에게 기대했던 가능성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질문을 안고 나는 지금 다시 그들의 이름을 부른다. 짧지만 불꽃같던 그 생들을. 내가 경외했던 그 예술의 조각 조각.

지금은 조금 더 웃으면서, 그리고 아주 조금은 덜 다치기를 바라며.

그리고 2010년, 26세의 젊고 예민했던 나에게 감사를 보낸다.


*본 글은 2010년 미술전문계간지 아트바스의 본인 글을 약간의 수정 및 회고 하였으며, 이미지 저작권은 출판시 각 유족측으로 부터 허락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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