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아트란 무엇인가?

아름다움만으로 충분한가

by kim hojin

미디어아트라는 단어는 이제 더 이상 낯설지 않다. 대형 몰입형 전시, 체험형 인터랙션, 실감형 영상 콘텐츠까지. 우리는 일상적으로 ‘미디어아트’라는 명칭을 접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그 본질에 대해 묻는다면, 쉽게 정의 내리기 어렵다. 무엇이 이들을 ‘아트’로 만드는가? 아름답고 감각적인 디지털 영상이면 모두 미디어아트가 되는가?

유독 한국이 미디어아트 장르에 대해 매우 너그러운 편이다.

미디어(media)라는 단어는 라틴어 medium(중간, 매개체)에서 유래하며, 20세기 중반 이후엔 mass media(신문, 방송 언론 따위)의 영향 아래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예술 안에서의 ‘미디엄’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표현의 방식이자 사유의 통로이며, 예술가가 감각과 의미를 동시에 매개하는 층위다.

미디어아트는 곧 매체를 통해 사고하는 예술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기술을 사용하는 것이 아닌, 매체 자체에 대한 질문에서 출발해야 한다.

작년 디스트릭트 전 부사장을 만난 자리에서, 나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몰입형 콘텐츠를 예술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그 안에 영혼, 정신성, 혹은 내면을 담을 수 있을까요?”

그들은 최근 자사 콘텐츠를 미술 경매 플랫폼인 소더비에 출품하며 “예술로서 인정받는 실험”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행복해하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경험 그 자체가 예술일 수 있다고도 말했다.
그 말은 부분적으로 맞다. 현대예술은 관객의 감정, 경험, 반응을 중요하게 여기며, ‘즐거움’도 충분히 예술의 일부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다시 묻게 된다.


“아름다움만으로 충분한가?”


우리가 ‘포토존’처럼 소비하는 미디어아트는, 과연 예술이 본래 지니는 깊이와 울림을 전달하고 있는가?

이야기를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해, 나는 미국의 대표적 비디오아티스트 빌 비올라(Bill Viola)를 떠올렸다.
그는 ‘물’과 ‘시간’을 주제로 수십 년간 작업해 온 예술가다. 그의 작품은 물의 투명성과 흐름을 통해 인간 내면과 죽음, 명상, 영혼에 대한 사유를 끌어낸다. 물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정신성과 감각을 동시에 매개하는 ‘미디엄’으로 작용한다.

Bill Viola, Five Angels for the Millennium-Departing Angel, 2001


내가 디스트릭트에 물었다.
“당신들이 사용하는 디지털 기술 안에서, 빌 비올라처럼 하나의 미디엄을 통해 사유할 수 있는 여지는 있는가? 물처럼 시간과 감정이 응축된, 느리지만 깊은 경험을 줄 수 있는가?”
그들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느끼고, 행복해하며, 그것으로 위로받는다면… 그것 역시 예술이 아닐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의문이 남았다.
그 감정은 과연 감동인가, 아니면 설계된 시각적 쾌감인가?
예술은 감탄으로 충분한가, 아니면 질문과 사유를 남겨야 하는가?


지금의 미디어아트는 19세기말의 아르누보(Art Nouveau)와도 닮아 있다.


당시 사람들은 장식적이고 유려한 곡선, 자연에서 모티프를 가져온 무늬에 열광했지만, 예술의 깊이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다.
오늘날의 미디어아트 전시장에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사진이 잘 나오는 포토존 같아.”
그 말은 곧, 감각적으로는 ‘예쁘지만’, 예술로서의 깊이에 대한 불확실한 인식을 드러내는 것 아닐까.?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을 주제로 하는 몰입형 콘텐츠

기술은 계속 진보한다. 실감형 콘텐츠는 점점 더 ‘진짜처럼’ 보이고, 몰입의 깊이는 더 깊어진다. 하지만 예술은 진짜처럼 보이는 것을 넘어, 진짜를 느끼게 해야 한다. 예술은 감각의 깊이뿐 아니라, 정신의 깊이를 요구한다. 미디어아트가 진정한 예술로 작동하려면, 그 아름다움 너머에 사유, 의문, 정신성, 그리고 영혼의 떨림이 담겨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다시 묻고, 다시 생각해야 할 질문이다.


“미디어아트란 무엇인가?”, “아름다움만으로 충분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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