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시작되면 문득 떠오르는 우산이 있다. 어린 시절, 서울역전에서 팔던 파란 비닐우산
대나무로 대충 만든 듯 투박하고 무거운 우산이었지만, 그 파란색은 내게 유난히도 이쁘고 반가운 색이었다. 우산을 파는 아저씨는 500원에 그 우산을 팔았고, 나는 비가 오는 날이면 그 우산을 꼭 들고 다녔다.
투박한 손잡이와 쉽게 찢어지는 비닐, 꽤나 무거운 우산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 들려오는 빗소리는 마치 작은 세계 안에 나만 있는 듯한 기분을 주었다.
그 시절, 어머니와 손을 잡고 골목길을 걸으며 집으로 돌아오던 풍경이 있다.
플라타너스 넓은 잎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시멘트 바닥에 빗살무늬로 파 놓은 홈을 따라 흐르던 물줄기, 자동차에서 흘러나온 기름이 물과 섞여 만들어내던 푸르스름한 마블링
도시가 막 정비되던 80년대 말, 비는 거리의 먼지를 씻고 공기를 식히며 잠시 도시의 시간을 멈추게 했다.
골목길 언덕에 투박한 시멘트 길은 촘촘한 홈이 파져 있고, 빗물은 작은 파도가 되어 내려왔다.
어머니는 그때마다 말씀하셨다. “비가 오면 거리가 깨끗해져서 기분이 좋아진다”
사람들의 담배꽁초며 쓰레기들이 빗물에 씻겨 내려가듯, 장마는 세상을 잠깐 정화해 준다고
요즘 딸아이와 비 오는 날 걷다 보면, 가끔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얼마 전, 딸아이가 “비 오는 거 싫어”라고 했기에 나는 어릴 적 어머니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러자 딸은 말한다. “아빠가 그렇게 말하니까 나도 비가 좋아지는 것 같아요.”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어릴 적 나와 어머니 사이의 기억이 지금 내 딸과 나 사이에서 조용히 스쳐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장마는 내게 단순한 계절 현상이 아니라 마음을 가라앉히는 시간이기도 하다.
빗소리를 듣고 있으면 마음도 함께 조용해지고, 창문에 부딪히는 물방울 소리에는 묘한 공명이 있다.
도심이 고요해지고, 하늘은 낮아지며, 세상이 잠시 숨을 고르는 듯하다.
그러다 보면 잊고 지냈던 감정들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오래전에 만났던 사람들, 그리웠던 누군가, 혹은 떠나간 인연들까지
그 기억들이 때론 아프고 슬프더라도, 나는 그 감정을 그대로 품는다. 기쁘든 슬프든 좋은 기억이든 그렇지 않든 그 모든 것이 지금의 나를 이루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장마는 그런 감정들을 꺼내어 조용히 바라보게 하고, 다시 마음속 깊은 곳에 넣어두게 한다.
난 계절이 다섯 개라고 생각한다. 그중에 장마는 나에게는 그런 계절이다. 고요하고 정직하며, 감정을 잠시 들여다보게 하는 계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