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케이지는 현대미술을 망쳤는가? — 아무것도 하지 않는 예술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음악. 관객의 숨소리가 곡이 되는 무대에서 진행한 존 케이지의 4분 33초는 과연 예술일까, 아니면 해프닝일까? 현대예술의 개념을 뒤흔든 이 침묵의 작품이 예술의 가능성을 넓혔는지, 예술을 가볍게 만들었는지 묻고 싶다.
우리는 예술을 감상하러 간다. 소리를 들으러 간다. 그런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오로지 정적만 흐른다. 그 정적마저도 누군가의 기침 소리와 관객의 움직임으로 채워진다.
이때부터 질문이 시작된다.
이건 음악일까? 아니면 예술일까?
존 케이지의 4분 33초를 두고 우리는 쉽게 혼란에 빠진다. 연주자는 무대에 올랐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건반은 눌리지 않았고 피아노는 침묵했다. 그러나 그 순간,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관객의 숨소리, 의자 끄는 소리, 누군가의 기침. 그날 그 공연장에서 들렸던 모든 비의도적인 소음이 작품의 일부가 되었다는 주장. 우리는 그 정적 속에서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것은 음악인가? 아니면 예술인가?
관객은 연주자가 될 수 있을까?
케이지는 기존의 음악적 형식을 해체했다. 연주자가 음을 만들어내지 않아도 음악은 존재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그가 지시한 것은 ‘정적’이 아니라 ‘정적 속에 벌어지는 모든 것’을 음악으로 바라보는 태도였다. 그리고 그 관점은 하나의 개념이 되었다.
연주를 하지 않는 연주자, 소리를 기다리는 청중, 무대와 객석 사이의 경계를 흔드는 구성, 이후 개념 미술, 퍼포먼스, 관객 참여형 작업에서 그의 흔적은 명확하게 이어졌다.
하지만 나는 이 지점에서 회의가 생긴다. 정말로 그 행위가 음악이었는가? 아니면 음악에 대한 해체적 논평이었는가?
음악은 듣기 위해 존재한다. 그런데 4분 33초는 듣지 못하게 한다. 그 시간 동안 청중은 침묵 속에서 각자의 해석을 떠올린다. 어쩌면 그 해석의 여지가, 예술이라는 이름을 가능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여지가 지나치게 열려 있다는 것이 문제이기도 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은 곧 ‘왜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무력화시킨다. 해석을 위한 해석, 개념을 위한 개념. 결국, 작품은 점점 설명에 의존하게 된다.
나는 이 부분에서 케이지를 의심한다. 그는 질문을 던졌지만, 답을 남기지 않았다. 그 빈자리에는 사람들의 오해, 남용, 과장된 평가들이 쌓여간다.
존케이지는 현대미술을 어떻게 망쳤는가?
그러나 이 모든 논의가 음악에 대한 것이든, 퍼포먼스에 대한 것이든 결국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현대미술이다. 존 케이지는 연주하지 않는 음악을 통해, '하지 않음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개념을 던졌고 그 개념은 미술로 흘러들었다. 개념미술, 행위예술, 관객 참여형 퍼포먼스, 심지어 설치미술의 일부 경향까지 케이지 이후의 현대미술은 더 많은 '의미의 해석'과 '참여의 여지'를 요구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생긴 부작용도 적지 않다.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동시에 ‘아무것도 예술이 아닐 수도 있다’는 회의로 돌아왔다. 작가의 부재, 개념의 남용, 설명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 작품들 그리고 관객에게 떠넘겨지는 감상의 책임 이런 현상은 케이지가 처음 열어젖힌 문 너머에서 지금의 현대미술이 방향을 잃고 떠다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존 케이지는 현대미술을 망쳤다고 생각했다.
그 이면에는 아주 우아하게, 아주 영리하게 망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