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10. 02
몇 년 전이다.
미처 뼈암인 줄 몰랐을 때.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대구 신천동에 위치한 맹인협회 안마소를 찾았다. 기말문제로 학생과 통화 중이던 내가 교수라는 것을 안마사분이 듣고는 어느 학교에 다니느냐고 물어보았다. 대가대라고 답하자, 그분은 눈을 잃기 전 그 학교에서 짝사랑하는 사람과 마지막 데이트를 했던 기억을 꺼내놓았다.
그분은 시신경을 잃기 바로 전 주에 오랫동안 짝사랑했던 사람과 노란 단풍이 물든 학교 잔디밭에서 간단한 주먹밥을 나누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그가 묘사하는 풍경은 나에게 익숙해서 그런지 평범하면서도 생동감 있게 다가왔다. 노란 은행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떨어지고, 따스한 햇살 아래에서 그가 느꼈을 설렘과 감동이 그의 목소리에 스며 있었다.
그런데 놀라웠던 것은 눈을 잃은 뒤에도 그의 눈 속에는 늘 그 노란 은행잎들이 남아 있다는 말이었다. 비록 그가 더 이상 빛을 보지 못하게 되었지만, 마음속엔 영원히 그날의 풍경이 남아 있는 것이다. 사고 현장이 그가 마지막으로 본 장면일 텐데도, 그는 그보다 더 아름답고 소중한 순간을 마음에 품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인생에서 인상 깊었던 순간들이 어떻게 우리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삶의 힘이 되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비록 시각적으로 세상을 보는 능력을 잃었지만, 그의 기억 속에서 그 찰나의 순간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시각이 아닌 마음으로 새겨진 아름다움은 이렇게 남아 있는 것이라.
우리 인간에게는 가끔 아주 짧은 순간에도 삶의 에너지를 채워주는 특별한 기억이 있다. 그 순간의 감정과 풍경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가졌는지는 시간이 지나도 흐려지지 않는다. 오히려 어려운 순간마다 그 기억이 다시 떠올라 우리에게 위안을 주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준다. 그날의 은행잎은 힘들고 어두운 시간 속에서도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작은 불빛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