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아트바스, 가을호 _구본주 · 박이소
한국 미술계에서 활동한 지도 어느덧 20여 년이 되었다. 아주 젊었던 20대 초중반 시절 나는 많은 작가들을 만났고, 전시를 기획했으며, 그들과 좋은 관계로 지냈었다. 최근 한 대가 예술인의 장례식장에서 오랜만에 그 시절의 동료들을 마주했다. 그들의 깊어진 눈가와 허리를 반쯤 굽힌 몸을 보며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지 실감했다. 나는 2년 전 희귀암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었다. 생존을 넘어서 내 삶의 무게와 예술을 되돌아보게 되었고, 그렇게 나의 감정과 작업, 기억의 흐름들을 다시 더듬기 시작했다. 그 시간 속에서 문득 오래전 한 글이 떠올랐다. 16년 전, 내가 미술전문지 기자로 일하던 시절 썼던 원고.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작업으로 여전히 살아 있는 네 명의 예술가들에 대한 기록이었다. 그들이 남긴 것은 이름이 아니라 작품이고 감정이고 삶의 방식이었다. 권진규는 조각 앞에서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손을 거친 흙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살아 있다. 유재하, 김광석, 이상. 이름만 들어도 그들이 떠난 자리에 남긴 여백이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짧은 생의 끝에서 예술은 어떤 방식으로든 계속되고 있었다. 나는 그 글을 지금 다시 꺼낸다. 완전히 새롭게 쓰기보다 그때의 감정과 시선을 되살려 이 플랫폼에 다시 기록하고자 한다. 그 시절의 문장이 지금의 내 삶과 겹쳐지는 자리에서, 나는 다시 그들의 이름을 부른다.
삐쩍 마른 사내가 길게 목을 내밀고 달려간다. 어딘가로 쫓기듯 하지만 어쩌면 그는 그저 살아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구본주의 조각 <Mr. Lee> 시리즈는 단지 희화된 인물이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 누구나 겪는 무기력과 단절을 형상화한 조각이다. 웃고 있지만 결코 웃을 수 없는 얼굴. 뒤틀린 자세와 왜곡된 몸짓 속에 담긴 현실. 구본주는 1967년 포천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한 조각가였다. 그는 민중미술의 흐름 안에서 조각이 시대를 어떻게 끌어안을 수 있는지를 실험해왔다. 그의 초기 대표작 <갑오농민전쟁> 연작은 과거의 기록이 아닌 현재의 질문이었다. 그는 말했다. 혁명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시작된다고. 삶을 바꾸는 것은 구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의 각성이기도 하다고. 구본주는 조각으로 말했고 그는 말보다 조각을 믿었다. 1990년대 이후 그의 작업은 점점 도시의 일상과 사회 구조로 시선을 옮겨왔다. 샐러리맨의 뒤틀린 어깨와 휘어진 척추는 단지 노동의 피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전체가 얼마나 흔들리고 있는지를 드러냈다. 그는 사회 비판적인 감수성을 블랙코미디처럼 풀어내면서 현실을 차갑게 바라보았다. 그의 조각은 무겁고 진지하지만 동시에 어딘가 슬프고 웃기다. 웃기다 못해 비극이 되는 삶의 풍경들. <아빠의 청춘>에 등장하는 중년 남성은 담배를 문 채 노상방뇨를 하고 있다. 전봇대에 기댄 그의 뒷모습은 초라하지만 낯설지 않다. 구본주는 점점 사랑과 가족이라는 키워드로 작업의 결을 확장해 갔다. 그는 삶의 비극은 거창한 데 있지 않다고 믿었다. 오히려 가장 사소한 장면에서 사람은 무너지고 다시 일어선다고 생각했다. 2003년 가을 그는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서른여섯. 장례식장에는 그의 동료와 제자들 지인들이 가득 모여 있었다. 그의 졸업논문 마지막 장엔 이렇게 적혀 있다. “바래지 않는 빛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는 당신께.” 그가 조각한 것은 단지 형상이 아니라 시대를 향한 시선이었고, 그의 조각들은 여전히 우리 곁에서 말하고 있다.
박이소의 죽음은 조용했다. 2004년 4월 28일. 그는 작업실 책상 앞에 기대어 앉은 채 세상을 떠났다. 책상 위에는 그가 좋아하던 와인 한 병과 음악이 있었다. 그는 박철호였고 박이소였으며 때로는 박모라는 이름으로 존재했다. 이름조차 불확실했던 그는 언제나 정체성이라는 질문 안에 살았다. 그는 존재 자체를 예술의 매체로 삼았다. 그는 뉴욕에서 대안공간을 운영했고 오랫동안 미국에서 이민자로 살아갔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는 사디(SADI)에서 교수로 일하며 포스트모더니즘 개념을 소개하고 새로운 실천을 모색했다. 그의 퍼포먼스는 느리고 허술하고 목적이 없었다. 검은 밥솥을 머리에 쓰고 브루클린 다리를 걷던 그의 행위는 유쾌하면서도 아프고, 낯설지만 왠지 익숙했다. 그는 이민자로서의 불안정한 정체성과 언어 문화 사이에서 발생하는 오해와 결핍을 작업으로 드러냈다. 그의 허술함은 의도된 것이었다. 완성보다는 과정에, 목적보다는 멍한 시간에, 그는 의미가 아닌 여백을 남기려 했다. 그는 번역을 했다. 외국의 미술 이론서를 한국어로 옮기며 그는 번역 자체를 하나의 미학적 작업으로 여겼다. 그에게 번역은 단지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적 질서의 재구성이었다. 완벽한 전달이 아닌 불완전한 이식. 그는 그 어긋남 속에서 새로운 감각을 읽었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늘 뭔가 빠져 있었다. 설명이 끝나지 않았고, 작가의 이름조차 흐릿했다. 박이소는 자신을 지우고 질문만 남긴 예술가였다. 그의 작업은 지금도 명확하지 않지만 그래서 오래 기억된다. 그는 끝내 해석되지 않았고, 그래서 예술사에 오래 남게 되었다.
*본 글은 2010년 미술전문계간지 아트바스의 본인 글을 약간의 수정 및 회고 하였으며, 이미지 저작권은 출판시 각 유족측으로 부터 허락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