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같이 살다간 그들 ②

2010년 아트바스, 가을호 _이향미 · 손성완

by kim hojin

Miserrere mei, Deus, 이향미

그녀의 작품을 처음 본 건 오래전 대구의 한 소규모 전시 공간이었다. 전시장의 조용한 공기와 정제된 색의 흐름, 캔버스를 따라 흘러내리는 물감의 궤적은 단순히 시각적인 경험을 넘어 감정의 결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말없이 오래 바라보게 만드는 색과 그 색에 연결된 시간들의 속성. 어쩌면 그것이 이향미가 남긴 세계였다. 그는 서울예고를 거쳐 홍익대학교, 효성여대, 미국 하트퍼드 대학까지 공부하며 작업의 실험성과 순수성, 그리고 내면의 고요함을 놓치지 않았던 작가였다. 전위미술단체 <35/128>에서 활동하며 퍼포먼스와 개념미술의 실험을 거쳤지만 정작 그의 작품은 침묵과 사유에 가까웠다. 그는 말과 행동보다 작업으로 표현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작업보다 더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이향미의 대표작 <색자체> 연작은 물감이 캔버스를 따라 흐르는 행위 그 자체로 구성된다. 이 작품에서 색은 색 이상의 것을 말하지 않는다. 흘러내리는 붉음과 푸름, 어두움과 밝음은 감정의 농도처럼 보였고, 시간의 농축처럼 느껴졌다. 그는 자신의 의도를 배제하고자 했지만, 오히려 그 의도 없는 흐름 안에서 그의 삶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났다. 미국 유학 시절 가족과 떨어져 지내며 겪었던 외로움과 긴장, 내면의 갈등이 그의 작업에 스며들었다. 귀국 후 그는 사람을 거의 만나지 않았다. 시를 읽고, 신을 묵상하며, 자신의 감정과 마주했다. 1994년작 <Miserere>는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시편의 첫 구절을 제목으로 삼은 세 폭의 회화였다. 흘러내리는 색과 대조되는 밝음과 어둠의 경계는 믿음과 고통, 속죄와 기다림의 감정이 얽힌 풍경이었다. 그의 작업은 조용했지만 강렬했고, 절제되어 있었지만 지극히 감각적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이향미를 조용하고 예민한 사람이라 기억한다. 그는 농담을 잘 하지 않았고, 작품에 대해 쉽게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까이서 지켜본 이들은 그의 모든 작업이 결국 ‘사랑’에 대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타인을 향한 연민, 가족에 대한 책임, 신을 향한 헌신. 사랑은 그에게 가장 강한 감정이자, 가장 쉽게 다치게 하는 것이었다. 그의 여동생인 화가 이명미는 <내 사랑 나의 누이>라는 작품에서 언니를 추억하며 보들레르의 시 한 구절을 강아지의 입을 빌려 읊게 했다. 그 그림의 배경에는 이향미의 <색자체>에서 흘러내리던 색채가 흐릿하게 녹아 있었다. 두 자매는 함께 시를 읽었고, 함께 고요한 슬픔 속에서 살아 있었다. 이향미는 조용히 작업했고 조용히 기억되었다. 그녀의 작업은 삶과 분리되지 않은 상태로, 지금도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다.


생각을 옮겨서 묘(妙)를 얻다

손성완은 직관적인 사람이었다. 감정보다 구조를 중시했고, 조형보다 사상을 먼저 바라봤다. 그는 동양화적 사유와 현대미술의 추상 사이 어딘가에 서 있었다. 그의 작업 <천상>은 중국 동진의 고개지가 말한 회화이론 ‘천상묘득’에서 제목을 따온 것이다. 형상을 따라 정신을 그리고, 생각을 옮겨 그윽함을 얻는다는 뜻. 손성완은 이 문장을 마음속에 품고 작업을 이어갔다. 그는 사물의 외형이 아니라 그 사물이 불러일으키는 감정과 에너지에 집중했다. 그의 화면에는 수묵이 흘렀고, 선이 굽이쳤으며, 여백은 숨 쉬듯 구성되었다. 하지만 그 여백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숨기고 있는 공간이었다. 그는 무를 통해 유를 드러내고, 유를 통해 무의 깊이를 확장했다. 그의 작업은 조용했고, 때로는 어두웠지만 단단했다. 돌출된 선과 번짐은 조형적인 장식이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였다. 그는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았고, 작품에 설명을 덧붙이지도 않았다. 그는 보는 이의 관조를 믿었다. 사유는 작가의 몫이 아니라 관객과의 대화에서 완성된다고 생각했다. 손성완은 짧은 기간 동안 수많은 전시를 소화했다. 국내뿐 아니라 바젤 아트페어 등 해외에서도 주목을 받았고, 자신의 표현 세계를 넓히려는 열정이 컸다. 그러나 2006년, 그는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너무 빠른 작별이었다. 손성완의 작업은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는다. 그것은 동양의 철학, 현대적 추상, 미묘한 직관, 그리고 무엇보다 그 자신만의 시선이 겹쳐진 결과였다. 그는 존재의 본질을 묻는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고, 그것은 한 사람의 삶이 사라진 이후에도 여전히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의 작업은 남아 있고, 그 질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에필로그_불꽃과 장작불의 조응

그때 나는 그들이 불꽃 같다고 생각했다. 짧고 뜨겁고 단숨에 타오르고 사라졌지만 그 불꽃은 어딘가 찬란했고 멋졌고 심지어는 숭고해 보이기도 했다. 죽음은 비극이었지만 그들의 삶은 그렇게만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들의 작업 앞에서 경외감을 느꼈고, 그 짧은 생이 만들어낸 예술의 밀도에 압도되었다. 그들은 진지했고 단단했고 위태로웠지만 분명 멋있었다. 나는 그들을 기록하며 나도 언젠가 저런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그들의 나이가 되었고, 살아남았다. 그것도 딸을 혼자 키우는 홀아비로, 암을 한 번 이겨낸 몸으로, 더 이상 불꽃같은 삶은 나의 계획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현실은 장작불처럼 오래 가야 하고, 삶은 버티는 쪽에 가깝다. 하지만 그때의 내가 감탄했던 그 불꽃 같은 삶은 지금도 내 안에 남아 있다. 지금의 나는 그 삶을 닮고 있지 않지만, 그 기억은 여전히 내게 영향을 주고 있고, 그 감정은 아직 퇴색되지 않았다. 나는 그들에게 썼지만, 이제 그 글은 나에게 되돌아온다. 그때 내가 그들에게 품었던 감탄은 결국 나에게 기대했던 가능성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질문을 안고 나는 지금 다시 그들의 이름을 부른다. 짧지만 불꽃같던 그 생들을. 내가 경외했던 그 예술의 조각 조각.

지금은 조금 더 웃으면서, 그리고 아주 조금은 덜 다치기를 바라며.

그리고 2010년, 26세의 젊고 예민했던 나에게 감사를 보낸다.


*본 글은 2010년 미술전문계간지 아트바스의 본인 글을 약간의 수정 및 회고 하였으며, 이미지 저작권은 출판시 각 유족측으로 부터 허락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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