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후지테레비 플란다스의 개

예술은 외면받고, 세상은 공정하지 않았다

by kim hojin

한 소년의 죽음보다,

그가 품은 예술의 혼이 어떻게 외면당했는지를 이야기한다.


'플란다스의 개'는 영국 소설가 위다(Ouida)의 소설을 바탕으로 1975년, 일본 후지 테레비에서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다. 한국에서는 1997년, IMF 한파 속에서 방영되었다. 원작보다 애니메이션이 훨씬 더 널리 알려져 세계 여러 나라에 퍼졌고, 원작의 무대였던 벨기에에서는 이 애니메이션의 정서가 너무 강하게 남아 실제 관광지에서 캐릭터를 의도적으로 배제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하지만 내게 이 작품은 그런 논란이나 시대의 틀로 남아 있지 않다. 내가 처음으로 예술이라는 것을, 감정이 그림으로 어떻게 옮겨지는지를 느낀 순간이 바로 이 애니메이션이었다. 누군가 내게 예술의 시작을 묻는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파트라슈라고 대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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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수녀가 된 아로아의 회상으로 시작된다. 성당 안, 아이들과 함께 있는 그녀는 웃으며 말한다. 루벤스보다 더 위대한 화가가 있었다고. 아이들은 고개를 갸웃하지만, 그녀는 조용히 지난 시간을 꺼낸다. 언덕 위의 어느 날. 부드러운 바람이 불고, 파트라슈는 땅에 몸을 누이고, 어린 네로는 헌 잡지 뒷면에 콘테로 스케치를 하고 있었다. 그림 속엔 웃고 있는 아로아와 그 뒤편으로 돌고 있는 풍차가 있다. 종이는 낡았고 선은 흐릿했지만, 그 장면에는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원근법도 명암도 없었지만, 그 바람결에 종이 위의 선들이 살짝 움직이는 듯 보였다.

네로는 화가를 꿈꾸는 가난한 소년이었다. 어느 날, 술에 취한 인간에게 학대받던 개를 길에서 마주하게 된다. 몸은 상해 있었고 눈에는 기운이 없었던 죽어가던 강아지 파트라슈를 네로가 거두었다. 네로는 파트라슈에게 새로운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그는 그 개가 불리던 그대로, ‘파트라슈’라 불렀다. 네고가 파트라슈의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가 타인의 정체성을 조심스럽게 배려할 줄 아는 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군가의 지난 시간을 지우고 새롭게 덧씌우기보다는, 그가 살아온 날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태도. 말없이 건네는 그 마음은 조용하지만,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그들의 가족은 단출하다. 네로, 파트라슈, 할아버지. 우유를 배달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그 소년은, 배달을 마친 뒤에는 늘 그림을 그렸다. 손에 잡히는 종이면 어떤 것이든 스케치를 했고, 때로는 헌 잡지의 뒷면이나 마분지 조각도 그에게는 캔버스가 되었다. 성당의 그림이 열리는 날이면, 그는 일을 마치고 그곳을 찾아가곤 했다. 안트베르펜 대성당. 루벤스의 재단화는 늘 베일에 가려 있었고, 특정한 후원이 있거나 특별한 날에만 공개되었다. 하지만 네로는 기다렸다. 기회가 찾아오길, 그 그림을 직접 볼 수 있기를. 그렇게 그는 그림을 꿈꾸었고, 매일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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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성당에서 루벤스를 기리는 미술 공모전이 열린다는 소식이 퍼졌다. 네로는 그 소식을 듣고 조용히 결심을 한다. 하지만 그에겐 캔버스를 살 돈조차 없었다. 그런 그를 유심하게 지켜보던 한 화가는 아무 말 없이 화방의 캔버스 하나를 우연한 기회를 만들어 몰래 내어준다. 네로는 그것으로 작업을 시작한다.

그즈음, 할아버지는 병상에 눕는다. 삶의 끝자락에서 그가 손자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짧았다. “그림을 그리거라, 네로.” 그 말 한마디는 유언이자 유산이었고, 네로는 밤이면 그림에 몰두한다. 그러던 중 마을 언덕 위의 풍차에서 불이 났고, 아로아의 아버지는 네로가 아로아를 못 만나게 한 일에 앙심을 품고 불을 질렀다고 오해한다. 이 오해로 인해 네로는 우유배달 일자리마저 잃게 된다.

네로는 그 모든 것 속에서도 그림을 완성한다. 그림 속에는 서로 마주 보는 할아버지와 파트라슈가 있다. 거칠고 투박한 선들, 일정하지 않은 색감, 구도의 중심은 할아버지의 가슴에 고정되어 있다. 그 자리에 시선이 머무르고, 정적이 깃든다. 화면 속 인물은 움직이지 않지만, 보는 이는 그들 사이에 흐르는 감정을 읽게 된다. 심사에서는 의견이 갈린다. 어떤 이는 기술을 말하고, 어떤 이는 진심을 말한다. 하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수상자는 따로 있었다. 네로는 그 그림을 바라본다. 그리고 조용히 고개를 떨군다. 그는 스스로 말한다. “난 아직 이 경지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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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535_15152_559.gif Peter Paul Rubens, The Descent from the Cross, Oil on panel, 421 × 311 cm, 1612–1614

그 후의 장면은 짧지만 깊다. 그는 더 이상 움직일 힘이 없다. 파트라슈와 함께 성당으로 향한다. 재단화가 열린다. 그리고 그 앞에 선다.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
루벤스가 그린 예수의 육체는 고통의 상흔보다는 빛과 무게로 묘사된다. 쇠약하거나 비참하지 않다. 그는 단단했고, 살아 있는 형상에 가까웠다. 고통을 넘어선 신체, 죽음이 아닌 초월의 순간. 그림 속 인물은 죽었지만, 그 육체는 살아 있다. 루벤스는 신의 육체를 통해 인간의 존엄을 말했고, 네로는 그 앞에서 조용히 입을 연다.
“파트라슈, 나 너무나 행복해.”


이 애니메이션은 단순한 비극으로 끝나지 않는다. 한 아이의 예술적 혼이 주변의 오해와 사회적 관습에 짓밟히는 과정, 남들의 시선에 민감하게 흔들리는 어른들의 편견, 그리고 순수한 창작의지가 어떻게 조용히 꺾이는지를 차분히 보여준다. 특히 애니메이션에서 등장하는 네로의 그림 묘사와 드로잉은, 그의 시선과 감정,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그 자체를 상징한다. 투박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진실성을 더한다. 이 작품은 한 아이의 삶과 죽음을 통해 예술의 순수함과 그 비극적 소외를 가장 심심한 언어로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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