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하늘을 바라보며 발견한 철학과 미학
인류는 아주 오래전부터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왔다. 신화는 하늘에 신의 자리를 마련했고 설화는 하늘과 인간을 연결하는 이야기를 남겼다. 하늘은 언제나 우리의 이상향이었고, 그곳을 향한 시선은 단순한 관측이 아니라 감정의 구조였다. 구름은 늘 다른 그림을 그리고, 밤이 되면 별은 반짝인다. 우리는 그 반짝이는 미지의 점들을 관찰하며 자연을 탐구했고, 결국 그것은 과학으로 이어졌다.
내가 천문학을 예술처럼 느꼈던 순간은 보이저 1호가 지구를 마지막으로 비추었던 장면에서였다. 1990년 태양계 바깥을 향해 날아가던 탐사선은 지구로부터 약 60억 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뒤를 돌아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그 사진에는 햇빛의 산란 속에 간신히 잡힌 하나의 희미한 점이 있었다. 1픽셀 이하, 색은 흐릿한 청색. '창백한 푸른 점'이라 불린 그 이미지 안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이 있었다. 전쟁과 평화, 사랑과 미움, 철학과 예술, 종교와 의심. 그 모든 역사, 감정, 서사가 그 작은 점 안에 담겨 있었다.
칼 세이건은 "그 점을 다시 보라. 그것이 여기에 있다. 그것이 우리의 집이다. 그것이 우리다." 그는 이 사진이 우리로 하여금 겸손하게 만들기를 그리고 이 작은 세계를 더욱 소중히 여기게 만들기를 바랐다. 나는 그에 동의했고 동시에 이 사진이 단순한 과학적 성과를 넘어선 하나의 중요한 미학적 사건이라 생각했다.
추상표현주의는 감정의 직접적인 흔적을 화면에 남기는 운동이었다. 잭슨 폴락의 액션이 그랬고 로스코의 색면 추상도 그랬다. 그들은 어떤 형상을 재현하지 않았고 오히려 형상을 지우려 했다. 그 자리에는 오직 감정의 리듬, 감응의 궤적만이 남았다. 나는 천문학이 가진 구조적 아름다움과 측정할 수 없는 압도적인 거리, 형태 이전의 운동, 그리고 별의 탄생과 죽음이 가진 극적인 감정을 추상표현주의의로만 설명할 수 있다고 느낀다. 성운의 곡선, 초신성의 폭발, 블랙홀의 침묵, 이 모든 우주의 현상들은 사실상 감정의 이미지와도 같다.
현대의 천문학은 허블 망원경을 시작으로 제임스 웹 망원경을 통해 이전에는 도달할 수 없었던 심연의 우주를 바라보고 있다. 그곳은 아직 빛이 닿지 않았던 영역이고 시공간의 가장 깊은 끝자락이다. 하지만 천문학의 관측의 행위는 단순한 과학적 관측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는 행위와도 닮아 있다. 예술가가 자신 안의 심연을 찾아가는 일, 감정과 무의식의 끝에서 무언가를 꺼내오는 그 과정과 같은 방향을 가진다. 천문학이 심연의 우주를 예술이 심연의 내면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각자의 언어로 미지에 대한 감응을 시도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 둘은 다르게 보이지만 같은 질문을 품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디에 있으며, 왜 존재하는가?"
천문학이 예술인가라는 질문에 나는 선뜻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여전히 과학이며 수치와 법칙의 세계를 기반으로 작동한다. 하지만 천문학은 인간이 자연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무언가를 모방, 기록, 표현하려 했던 시점이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하늘을 관찰하여 그리기를 시도했으다. 이때 예술을 시작했고, 별자리에 신화를 입히며 언어를 만들었고, 빛을 따라 시간을 구성하며 사고의 틀을 확장했다. 그렇기에 천문학은 예술의 가장 오래된 사유적 시초이다. 추상표현주의처럼 보이지 않는 감정과 형태를 표현하려는 욕망은 이미 인간이 처음으로 하늘을 올려다본 그 순간에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