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들멘 Jun 08. 2024

불청객

감성 에세이

오솔길에 들어서자 ‘웽웽’하는 아주 작은 소리가 들렸다. ‘날파리’라고도 하는 하루살이의 환영 인사인가? 날씨가 무더워 그냥 걷기만 해도 짜증이 나는데 …. 왼손을 들어 얼굴 앞과 귓가를 휘젓는다. 잠시 뚝, 하지만 다시 ‘웽웽’. 속으로 화가 났지만 어쩌겠는가. 묵묵히 가던 발길을 옮길 수밖에. 땅바닥에는 군데군데 갈참나무의 이파리와 도토리가 떨어져 나뒹굴고 있었다. 어젯밤에 심하게 불었던 비바람에 견디지 못하고 몸통에서 어쩔 수 없이 떨어져 나온 것이리라.


산등성이로 올라섰다. 그늘막이 적어져 햇빛이 더 강렬하게 느껴졌다. 한참 걷다 보니 하얀 꽃이 막 피어난 무궁화 무더기가 보였다. 어릴 때는 집 마당 한 귀퉁이에 한 그루 정도가 있을 정도로 귀했었는데 …. 관공서에서 사람들의 눈요기를 위해 일부러 무궁화 군락지를 만들어 놓은 결과겠지. 매미도 막바지로 한창인지 ‘맴맴’, ‘쓰름쓰름’ 하면서 애타게 짝을 찾고 있다. 산 비둘기 한 쌍이 갑자기 푸드덕 날아서 주위에 있는 나뭇가지에 앉는다. 길거리에서 보는 동네 비둘기처럼 도대체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거기에 더해 ‘여기는 내 영역이다’ 하며 과시하는 듯했다.


노란 수건을 목에 건 할머니 한 분이 보였다. 건강을 위해 시간을 내서 걷는 것이리라. 천천히 걸어가는 그녀를 스쳐 지나가며 슬쩍 얼굴을 보니 역시 땀을 흘리며 힘든 기색이 역력했다. 갑자기 목에서 노란 수건을 풀어서 귓가 쪽으로 휙. 산등성을 걷는 내내 얼굴 앞에서 뭔가 알짱거렸고, 귀에서는 ’웽웽‘ 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리라. 본의 아니게 땀 냄새를 풍겼지만, 그 미물을 부를 마음이 있었던 건 전혀 아닐 텐데.  


어릴 적 우리 집에는 암소 한 마리가 있었다. 나는 ‘누렁이’라고 이름 붙였었다. 겨울에는 볏짚을 주재료로 하여 어른들이 끓인 여물을 주로 먹었다. 반면 날씨가 더운 여름에는 싱싱한 풀이 누렁이의 먹거리였다. 아침에는 어른들이 하루 전에 베다 놓은 풀을 먹지만 누렁이의 저녁을 해결케 하는 건 아이들 몫이었다. 햇볕의 따가움이 조금은 누그러지는 오후 너, 댓 시가 되면 누렁이는 형 그리고 나와 함께 길을 걸었다. ‘독바위’라는 뒷산에 가서 풀을 뜯어 먹기 위해서다.


 뒷산까지 터벅터벅 걷는 누렁이의 눈은 한없이 평화롭게 여유로웠다. 그러나 수많은 쇠파리도 함께 했으니 마음속으로는 여간 성가시게 느끼지 않았을까? 누렁이 자신은 전혀 원하지 않는데 쇠파리가 몸에 달라붙어 있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나마 엉덩이 근처에 있는 쇠파리에게는 ‘싫다’라는 걸 표시할 수 있었다. 바로 꼬리로 냅다 치는 거다. 그러면 화들짝 놀란 쇠파리들은 본능적으로 살길을 찾아 줄행랑을 쳤다가 다시 앉는다. 누렁이의 꼬리에 맞아 죽은 쇠파리는 거의 없다. 반면 눈두덩이에 붙어있는 쇠파리는 누렁이 스스로 쫓아낼 수 없으니 도와달라는 듯 큰 눈만 껌벅거렸다. 어쩌다 눈이 마주쳐 눈두덩 근처 쇠파리를 쫓아주면 누렁이는 고맙다는 듯 다시 큰 눈망울을 껌벅거렸다. 지금도 그 모습이 생생하다. 


청설모 한 마리가 갈참나무 도토리를 보았는지 풀숲에서 나왔다. 산등성이 길에 놓여있는 도토리를 가져갈 심산인 모양이다. 나는 그러한 청설모를 핸드폰에 담겠다는 마음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그놈은 도토리를 내버려 두고 도로 풀숲을 지나 잽싸게 나무 위로 도망갔다. 내가 방해했나? 


세상에 자신의 희망이나 생각 또는 의지에 반해 대드는 존재는 불청객이 아닐까? 바로 할머니가 노랑 수건을 귓가 쪽으로 날리게 했던 ‘하루살이’, 누렁이가 꼬리를 냅다 흔들게 했던 쇠파리가 그런 존재들이다.

그런데 그게 어디 하루살이나 쇠파리 같은 미물뿐이겠는가? 사람들도 자기 이익이나 필요에 따라 그런 경우가 참 많겠지. 청설모가 도토리를 가져가는 모습을 담겠다고 핸드폰을 들이댄 나 역시 불청객이 아니었을까 여겨져 얼굴이 화끈거린다. 



작가의 이전글 마지막에는 그래도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