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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꿈 Aug 04. 2021

12화. 도깨비불

그해 여름 못다 한 이야기



드디어 여름 방학하는 날이 다가왔다. 소녀는 신비스러운 현상이나 공상 과학에 흥미를 강하게 느꼈으며, 예전부터 마을에 떠돌고 있었던 도깨비불에도 관심이 많았다. 아이들은 방학을 손꼽아 기다렸지만 소녀는 도깨비불을 보러 갈 날을 더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종업식 날이 되어 아이들은 1학기 동안의 활동을 적은 통신표를 받고 '수우미양가'를 각각 세어 보기도 하고 선생님께서 써주신 글을 읽어보기도 했다. 석이는 창의, 윤택이와 같이 단에게 가서 통신표를 보자고 하며 부러운 듯이 넌지시 물었다.

"단이 너, 이번에도 모두 '수'를 받았겠네."

"단이 말고 누가 전 과목 '수'를 받겠어. 전 과목 '수'는 정말 어려운 것 같아." 윤택이도 한 마디 거들었다. 그리고 소녀에게로 다가가서 단이가 공부도 잘한다며 친구 자랑을 늘어놓았다. 아이들은 다들 한 마디씩 단이 자랑을 했다.

"은설이 너, 단이가 운동 잘하는 것만 알고 공부 1등 하는 건 몰랐지?"

"단이는 6년 내내 1등만 하는 아이야."

"은설이는 통신표 안 주시네. 서울에서 받아서 그런가?"라고 넘겨짚어 웃으며 말하기도 했다. 소녀도 서울에서 전 과목 '수'를 받았지만 차마 그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소녀는 단의 통신표를 보며 자신의 통신표인 것처럼 기뻐하며 축하해 주었다. 윤택이는 통신표에 '수'가 하나밖에 없고 '양가'만 있다며 부모님께 통신표를 어떻게 보여드릴지 걱정이 태산 같았다.


모두 통신표를 받고 잠깐 쉬는 시간에 소녀는 복도 끝자락 섬이 바라보이는 쪽으로 단을 불러내었다. 그리고는 지난번에 약속한 말을 상기시키며 언제 도깨비불을 보러 갈 것인지 물었다. 단은 그 약속을 깜박 잊고 있었던 아이처럼 바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소녀가 다시 물으며 도깨비불을 보러 가는 약속을 상기시켰다.

"그게 좀···."이라고 하며 단은 고개를 숙인 채 미적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그게 좀? 못 간다는 말이니?"하고 소녀가 상기된 얼굴로 조금 실망한 듯이 말했다.

"그게 좀 어려울 것 같아. 마을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산 중턱으로 간다는 게."

"······."

소녀는 잔뜩 기대하고 있었던 일인데 낙담하여 말을 잇지 못했다. 단은 산 중턱에 가면 도깨비불을 볼 수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 소녀와 약속을 했었다. 그런데 산 중턱으로 가는 길에서 바다가 잘 보이는 쪽으로 조금 비켜 샛길로 내려가면 망부석을 세워 놓은 무덤이 있었다. 망부석은 10여 개가 있다고 하는데 옛날에 섬 앞바다에서 죽어 돌아오지 못한 어부들을 그리워하는 글이 새겨진 슬픈 기억을 간직한 비석이었다. 단이는 소녀와 도깨비불을 보러 갈려고 며칠 전에 형들에게 에둘러서 산 중턱에 대해 물어보다가 무서운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학교 뒷산에는 망부석이 모여 있는데 늦은 밤이나 흐린 날에는 그 주변에서 이상한 울음소리가 들린다는 소문이었다. 그 말을 전해 듣고 단은 소녀와 약속한 산 중턱으로 한 밤중에 간다는 것이 두려워졌다. 그래서 소녀가 약속을 상기시킬 때 차마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때 아이들이 1학기 마지막 날 종례를 한다고 하여 소녀와 단은 이야기를 다 끝내지 못하고 교실로 급히 들어갔다. 선생님께서는 아이들이 방학 동안에 역병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면서 면역과 관련해 말씀해주셨다.

"요새 역병이 창궐하여 '면역에 관하여'라는 책을 읽어봤단다."

"선생님, 역병에 걸리지 않고 우리 몸을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응, 좋은 질문이야. 그 책에서는 우리 몸을 정원에 비유했더구나. 나쁜 것이 우리 몸이라는 정원에 들어오려고 할 때 그것을 내쫓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쫓아버리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면 피하거나 예방에 신경을 더 써야 할 것 같아요."

"그렇지. 좋은 생각이야. 역병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고, 우리 몸을 지키기 위해 예방에도 신경을 쓰면 좋겠구나."

그리고 우리 몸을 지키기 위해 더 해야 할 것은 없는지 얘기하며 아이들은 수군거렸다.

"책에서는 우리 몸을 건강하게 지키기 위해 예방주사(백신) 같은 것도 맞아두는 것이 좋다고 했단다."라고 하시며 건강한 생활을 위해 여름방학 동안 꾸준히 전염병에 주의할 것을 간곡히 당부하셨다.


아이들은 선생님께서 하신 역병에 관한 당부의 말씀을 잘 새겨듣는 것 같았다. 방학식을 마친 아이들은 선생님과 인사를 나눈 후, 다들 건강하게 잘 보내고 방학을 마치면 다시 만나자며 손을 흔들면서 모두 집으로 내려갔다. 소녀는 단이와 같이 교문을 빠져나와 내려가다가 갈래 길에서 헤어지면서 나중에 저녁을 먹고 해가 질 때쯤 강나루에서 만나자고 하고 각자 집으로 달려갔다.

 

소녀는 집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은 후 할아버지께 저녁에는 친구들과 과제를 하기로 되어 있어서 조금 늦은 밤중에 돌아올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할아버지께서는 위험한 곳에는 가지 말고 과제를 마치면 곧장 집으로 와야 한다고 하시면서 볼일을 보러 나가셨다. 소녀는 일꾼들과 저녁식사를 마치고 살그머니 집을 나섰다. 그리고는 급한 일이라도 있는 아이처럼 서둘러 단이를 만나러 강나루로 뛰어갔다. 단이는 먼저 나와서 소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단은 어제저녁 나룻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을 때 소녀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마음을 바꾸었다. 소녀가 강나루에 왔을 때 아까 학교에서 오늘 도깨비불 보러 가기 어렵다고 한 말을 취소한다면서 약속을 지키겠다고 말했다. 소녀는 손전등과 서울에서 가져온 카메라도 준비하여 잔뜩 기대를 하고 왔기 때문에 단의 말을 듣고 무척 기뻐했다.


해질녘쯤이 되어 둘은 학교 뒷산 대나무 숲을 지나 산 중턱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강나루에 있었을 때는 석양이 건너편 산 위에 걸려 있었는데 학교 뒷산으로 올라가는 중에 해를 보니 벌써 물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서쪽 하늘과 바다에는 붉은 노을이 아름답게 펼쳐지고 있었다. 언덕 위에서 밭일을 하고 내려오던 아주머니를 만나서 인사를 하고 망부석이 모여 있는 쪽으로 올라가니 약초를 캐러 다니는 할아버지가 내려오고 있었다. 단이는 서로 잘 아는 사람처럼 인사를 드렸다. 그랬더니 약초 심마니 할아버지는

"너희들 세 사람 어디 가는 거니?"하고 물었다. 그러자 단은

"세 사람이라뇨? 우리 둘인데요."라고 되물었다. 그러자 심마니는

"너희 둘하고 저 뒤쪽에 한 명 더 따라오네."라고 하며 뭘 잘 모른다는 어투로 말했다.

분명 둘이 걸어가고 있었는데 세 명이라고 하니 이상했다. 소녀와 단은 심마니 할아버지가 잘못 본 것이라 여기며 그 말에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산 중턱 쪽으로 걸어 올라갔다. 그런데 두 사람이 서로 이야기를 하면서 걷는데 뒤쪽에서 자꾸 누군가가 두 사람이 하는 말을 따라 하는 것 같아 둘이 동시에 뒤돌아보면 아무도 없었다. 소녀와 단은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곧 밤이 깊어질 것 같아 조금 빠른 걸음으로 걸어 올라갔다. 몇 발자국 걷는데 또 뒤에서 나지막한 말소리가 들리며 같은 보폭으로 누군가가 따라오는 것 같아 다시 뒤돌아보았다. 그들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단은 형들이 전해준 괴상한 소문이 떠올라 갑자기 식은땀이 나고 소름이 돋았다. 소녀는 땀을 흘리며 걸어 올라가는 모습을 보며 힘드냐고 묻기도 하였지만 단은 대답할 기분이 아니었다.



산 중턱 언저리에 도착하여 바다 쪽을 바라보니 안갯속에 흐릿하게 섬이 보였다. 소녀는 손전등으로 불을 밝히고 카메라로 섬의 모습을 찍기도 하며 도깨비불이 보이는지 묻기도 하였다. 꼭 탐험가처럼 호기심에 찬 눈으로 이리저리 유심히 섬을 바라보는 모습이 매우 진지하였다. 먼바다에서 등대처럼 반짝이는 불빛도 있고 오징어잡이 어선에서 집어등을 켜서 나오는 불빛 같은 것도 보였다. 안개가 많아 섬은 아래쪽만 보였는데 도깨비불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잠시 뒤에 자세히 보니 섬 아래쪽 주변에 어떤 불빛이 자갈밭으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보이긴 했지만 납량특집 드라마 같은 데서 본 그런 휘황찬란한 불빛은 아니었다.


소녀와 단이 한참 섬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조금 아래쪽에서 이상한 울음소리가 들여오는 것 같았다. 사람의 울음소리 같기도 하고 짐승의 울부짖음 같기도 했다. 이상한 느낌이 들고 겁이 나서 두 사람은 급히 섬을 배경으로 카메라 자동 셔터를 눌러 사진을 찍고 내려가기로 했다. 단은 아까 내려가던 사람이 다쳐서 그런지도 모르니 울음소리가 나는 쪽으로 내려가 보자고 했다. 서둘러 산 중턱 샛길 쪽 망부석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는데 갑자기 울음소리가 점점 커졌다가 작아졌다가를 반복하였다. 이상한 것은 둘이 망부석 부근에 왔을 때 갑자기 울음소리가 멈췄다. 망부석 주변을 샅샅이 둘러봐도 인기척은 없었다. 둘은 자신들이 잘못 들은 소리인 줄 알고 산 중턱 아래로 내려가려고 하는데 또 뒤쪽에서 흐느끼며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온몸이 오그라들고 오싹해지며 팔에 소름이 돋았다. 이번에는 소녀도 단도 둘 다 모두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흐르는 것 같았다. 갑자기 한여름 밤 열대야 속 무더위는 온데간데없이 날아가버리고 으스스하고 묘한 기분이 되었다. 그런데 망부석 돌무더기 뒤쪽에서 하얗고 붉은 천이 휘감기며 시커먼 그림자가 쫓아오는 같았다. 둘은 '다리야 날 살려라.'는 심정이 되어 학교 뒷산 쪽으로 재빨리 내달렸다. 체육시간에 겁을 먹고 벌벌 떨며 뜀틀을 할 때와는 달리 몇 미터나 되는 높은 언덕도 두려움 없이 훌쩍 뛰어내리고, 늘 피해서 다녔던 가시덤불도 거침없이 가로질러 한 순간에 내달렸다.


학교 뒷산 쪽에 가까이 내려오니 마을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둘의 얼굴은 온통 땀범벅이 되었고 다리는 나뭇가지에 걸려 피가 흐르기도 하였다. 하지만 마을이 보이고 이상한 울음소리를 따돌렸다고 생각하니 기분은 상쾌했고 몸은 날듯이 가벼웠다. 단과 소녀는 뭔가 큰일을 해낸 것 같은 느낌에 자신들도 모르게 서로 손을 맞잡고 만세를 부르는 동작으로 탄성을 질렀다. 아이들은 이렇게 무한한 상상력과 다양하고 예측할 수 없는 경험을 통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어나가는 존재일까. 학교 뒷산을 지나 마을에서 나오는 옹기종기 모여 있는 불빛이 보이는 곳까지 내려왔을 때 '이제는 살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녀와 단은 조금 전에 있었던 무서운 기억을 금방 잊어버리고 모래톱 마을에서 새어 나오는 훈훈한 불빛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장기자랑 시간에 불렀던 섬집아기와 등대지기 노래를 흥얼거리며···. 학교 밑 마을 입구에 도착했을 때 소녀는 밤이 늦었으니 내일 다시 만나 카메라로 찍은 사진도 뽑고 섬의 전설에 대해 얘기하자고 하였다. 그리고 둘은 오늘 있었던 일은 비밀에 부치기로 하고 기와집 쪽으로 향했다. 단은 소녀가 기와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강나루를 거쳐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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