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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꿈 Aug 03. 2021

11화. 짝사랑일까

그해 여름 못다 한 이야기



아이들은 저마다 방학 계획을 세우며 여름을 맞이하고 있었다. 소녀와 단은 서로가 서로에게 길들여지고 있음을 알아채기 시작한 것일까. 둘은 멋진 모습을 떠올리며 서로에게 빠져드는 마음을 멈출 수가 없는 것 같았다.


몹시 애를 먹거나 어려움을 겪을 때 사용하기도 하는 말에 '홍역을 치른다.'라는 말이 있는데 무섭게 번지고 있는 역병이 꼭 그 꼴이었다. 아이들은 무더위도 이겨내야 하지만 역병이라는 병마도 물리치거나 피해야 하는 이중고를 겪으며 여름을 보내야 했다. 마음껏 뛰놀고 싶고 다양한 체험도 하고 싶었지만 그것이 맘대로 될 수 없는 방학이 되어 안타까웠다. 단이도 학기 중에는 학교에 다닌다고 평소 하지 못했던 일들을 여름방학이 되면 하나씩 해나가려고 계획했었다. 그런데 그런 일이 틀어지게 되니 속상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심심하고 울적한 방학을 보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싫어졌다.


며칠 되지 않았지만 혼자 있을 때는 그동안 학교에서 보여준 소녀의 모습이 자꾸 떠오르는 것이 이상하였다. 단은 소녀를 언젠가 본 듯한 얼굴이었지만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소녀의 모습에 대한 모든 기억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단은 혼자 강나루를 거닐며 장기자랑에서 바이올린을 켜던 소녀의 예쁜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너무나 가녀려 보이는 소녀에게짐작하기 어려운 대담한 연주 모습에 또 한 번 놀랐던 일이 생각났다. 처음에 놀란 것은 신비한 섬의 전설을 얘기했을 때 겁이 없는 당돌한 태도에 놀랐지만 이번 장기자랑에서 소녀는 시골 아이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었던 또 다른 매력을 보여주었다. 가녀린 듯했으나 강인하였고, 연약한 듯했으나 대범하였으며, 투박한 듯했으나 섬세하였다. 소녀가 모래톱 마을에 내려오기 전에 단은 모든 아이들의 우상이었고 어른들이나 선생님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아이였었다. 그런데 소녀의 남다른 대범함은 물론 호기심이나 섬세함은 지금까지 자신이 누려온 위치가 흔들릴 수도 있음을 어렴풋이 느끼게 해 주었다. 단은 소녀로 인해 더욱 분발하는 아이가 되어야 하는 딱한 처지가 되었지만 왠지 소녀가 밉지 않은 것이 이상했다.


소녀는 시골 생활 속에서도 서울에서 하던 일이나 부모님과의 약속들을 꾸준히 실천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시골에 온 처음 며칠은 강나루를 구경하러 산책도 가끔 나오더니 요즘은 릴 때부터 익혀오던 바이올린 연습도 하고 외할아버지께서 사주신 권장도서 읽기나 글쓰기에 심취하여 학교에서 굴을 보지 않으면 자주 만나기도 어려웠다. 학교를 마치고 오후에 단은 친구들과 만나 여름방학 숙제로 동식물 채집 계획을 세우기도 하고 다른 체험 계획을 세웠지만 옛날과 달리 신이 나지 않았다. 역병이 온 세상을 집어삼키고 있는 것짜증 나는 일이었지만 왠지 소녀와 같이 하지 않는 은 이유 없이 미가 없었다. 스스로 왜 그런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자신에게서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었다. 단지 모래톱 마을에 역병을 피해 지은설이라는 소녀가 서울에서 내려와 잠시 같은 학교에 다니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었다. 단은 친구들과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심심하여 강나루로 다시 나왔다. 그리고는 소녀를 만날 수 있을까 하여 기와집 대문 앞을 서성거렸다. 혹시나 소녀의 얼굴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고 또 자신을 발견한 소녀가 강나루를 산책하자고 할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기와집 대문 앞을 서성이며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소녀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리기 다. 한참을 대문 앞을 서성이며 왔다 갔다 해도 소녀는 보이지 않고 집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다. 단은 마을 아이들을 휘어잡았던 예전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니 쓴웃음이 나왔다.


단은 기와집 대문 앞에서 오랜 시간 서성였지만 소녀를 만나지 못하고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한여름이 되어 해가 길어서 그런지 저녁을 먹었는데도 해는 지지 않고 하늘은 훤하였다. 오늘따라 하루해가 긴 것이 야속했다. 빨리  밤이 되고 아침이 되어 날이 밝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루가 짧게만 느껴졌던 그날들은 어디로 가고 혼자서 이렇게 동네를 배회하고 있다니 마음 깊은 곳에서 외로움이 불현듯 밀려오는 것 같았다. 심심하고 울적한 기분을 달래려고 나루터로 다시 나가 바다로 갈 수 있는 나룻배를 막 타려고 했다. 그때 멀리서 소녀가 달려오며 단이를 불렀다.

"단, 나룻배로 어디 가려고?"

"응, 갈대숲 사이로 청둥오리도 보고 바닷바람도 쐬려고."

"우와, 너 나룻배를 저어 바다로 나갈 수도 있다는 거야?"

"어, 응. 노를 저을 수 있어."

"야! 단, 너 정말 멋지구나! 노를 저어 바다에도 나갈 수 있다니."

소녀는 자신도 나룻배를 타고 같이 가도 되는지 물었다. 단은 한참을 대문 앞에서 기다려도 만나지 못했던 소녀의 제안에 흔쾌히 함께 나룻배를 타고 나가기로 하였다. 소녀는 큰 배는 많이 타봤지만 이렇게 자그마한 배를 타본 적은 없다고 했다.



잔물결이 이는 호젓한 강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의 갈대숲 사이로 물에 미끄러지듯이 노를 저어 가는 단의 모습이 믿음직해 보였다. 한낮의 더위는 서서히 사라지고 서늘한 강바람이 이마를 스치며 긴 머리칼을 흩날릴 때 소녀는 한없이 달콤한 행복감을 느꼈다. 함께 나룻배를 타고 있는 단의 모습이 서쪽 하늘의 노을에 반사되어 물결 위에 일렁거릴 때 소녀는 아름다운 꿈을 꾸고 있는 듯하였. 서로  마주 보며 쳐다보는 것이 어색했었는데 물결 위에 비친 단의 얼굴을  훔쳐볼 수 있어 소녀는 행복했다. 갈대숲 사이로 불어오는 해 질 녘의 강바람이 너무 좋았다. 귓가에는 행운을 가져다주는 종달새 노랫소리도 들려오는 것 같았다.


세상은 참으로 변화무쌍하고 다양한 모습을 연출하는 마술사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소설 속에서 유명한 말을 많이 남겼는데 어른들이 자주 인용하는 글이 떠올랐다. '행복한 가정은 다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고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 서로 다른 이유로 불행하다.'라는 말이다.  속에서 행복떼려야 뗄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 같지만 행복한 사람들은 다 비슷한 이유를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병의 창궐이나 감염병 위험에 노출되는 것 또한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모래톱 마을처럼 역병에서 벗어나 행복한 공동체를 꾸리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것도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은 아닐까. 모래톱 마을과 같이 안전한 곳은 전염병의 특징을 정확히 파악해 올바른 대처를 하는 등 다들 비슷한 이유로 안전을 담보하고 행복도 찾아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역병에 걸리거나 그로 인해 아픔이나 불행을 겪는 사람들은 제각각 서로 다른 이유로 전염병에 노출되어 모두 지옥 같은 불행을 경험하는 것은 아닐까. 소녀는 해가 지는 나룻배 위에서 행복의 의미에 대해 몸으로 느끼있었다. 세상에는 여러 유형의 아이들이 태어나 자라고 있지만 소녀는 보다 영특하고 숙한 아이의 을 여과 없이 드러내 보여주고 있었다. 서울 생활의 연장선에서 낯선 시골에 내려와서도 잘 적응하며 지내는 소녀의 모습을 다들 대견하게 여겼다. 누군가가 탁월한 사람에게 규칙적인 습관이란 야망의 또 다른 표현이라 했던가. 소녀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성장해갈지 무척 궁금하기도 하고 기대가 되었다.


나룻배가 강 하구 모래톱을 지나 바다로 접어드는 곳으로 나갈 때쯤 해가 뉘엿뉘엿 빠르게 물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단은 오늘은 늦어서 바다로 나가는 것이 어렵겠다고 하면서 나룻배의 이물을 마을 쪽으로 돌렸다. 소녀는 바다 쪽을 응시하더니 단에게 바다 수영을 할 수 있는지 물었다.

"응, 바다 수영도 할 수 있어. 검푸른 깊은 바다는 어릴 때부터 익숙해져서 그런지 무섭지 않아."

"정말? 대단한데. 난 실내 수영만 해. 바다 수영은 파도 때문에 무섭기도 하고 좀 힘들어해."

"처음 바다수영을 하는 초보자는 파도 때문에 짠 바닷물을 마실 수도 있어."

"언제 나룻배 타는 거나 바다 수영도 좀 가르쳐 줄 수 있어?"

"방학이 되면 그때 가서 계획을 짜 보자."

소녀와 단은 바다 수영에 대해 얘기하며 나룻배를 타고 마을로 돌아오고 있었다.



노를 저어 오는 사이에 한 무리의 오리 떼들이 사뿐히 물 위에 내려앉기도 하고 한 쌍의 해오라기도 먹이활동을 하러 갈대숲 사이로 헤엄쳐 다니기도 했다. 소녀와 단은 자연이 주는 풍요로움 속에서 평화롭게 지내는 새들과 마찬가지로 하루의 저녁을 의미 있게 갈무리하고 있었다. 두 아이는 강나루에 나룻배를 묶어놓고 뭍으로 올라왔다. 단은 어둠이 내리고 있는 길을 따라 기와집 앞까지 소녀를 배웅해주었다. 단은 배려하는 마음과 아량이 넓은 멋진 소년이었다. 소녀는 오늘 있었던 나룻배 체험이 정말 뜻밖의 서프라이즈였다며 단에게 고마움을 귀여운 눈인사로 깜찍하게 표하였다.


강나루에서 우연히 만나 나룻배를 타고 가는 동안 소녀가 기뻐하는 모습들이 단뇌리를 스쳐갔다. 단은 소녀를 기와집까지 배웅해주고 돌아오는 길에 조금 전 오후에 자신이 혼자 느꼈던 우울함이나 쓸쓸함이 갑자기 사라진 듯해 신기하기도 하였다. 나룻배를 타고 갈대숲을 지나며 행복감을 느낀 것이나 아까 소녀가 보고 싶어 기와집 대문 앞을 서성거린 것에 대해 단은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하며 가벼운 발걸음이 되어 집으로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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