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에 대한 딸의 변명
책을 읽다 보면 감정이입 문제로 더러 난감할 때가 있다. 나 역시 글을 업으로 살지만 작가에게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글을 쓰는 것은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작가는 아버지를 여읜 지 2년이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아버지의 이야기를 책으로 엮었다. 방송국 다큐멘터리 작가이며 동시에 소설가인 작가는 생전의 아버지와 그리 다정한 부녀지간은 아니었다고 고백한다. 책을 읽다 보면 비슷한 생각을 하는 딸들이 많을 것이다. 대부분이 딸들에게 첫사랑이었다가 점점 멀어져 가는 아버지라는 사람들.
작가는 그 아버지를 인터뷰하기로 한다. 직업 특성상 수없이 많은 사람을 인터뷰하는 작가는 아버지를 인터뷰하기 전에 여러 복잡한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그 인터뷰가 끝나고 한 달 뒤에 아버지는 암 선고를 받는다. 작가는 10번의 인터뷰를 하고 나서 자신이 그동안 아버지를 미워한 게 아니라 사랑하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 후 1년이 채 안 돼 아버지가 떠나신다.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은 이미 예상했던 대로 “이 책을 나의 아버지에게 바칩니다.”이다. 작가 딸을 둔 아버지에게 이 보다 더 큰 선물이 있을까. 책을 읽으면서 나는 작가가 된 지 10년이 훨씬 지나도록 제대로 내 아버지에 대한 글 한 편 써보지 않았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그러다가 어느 지점에서 끝내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89. 아버지
소설가는 고생하는 것에 비해 너무 대접을 못 받는 것 같아요. 저는 방송작가 일을 함께 하면서 생활비를 벌지만 소설만 써서 밥을 먹고산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에요.
-내가 잘 알지는 못하지만 나는 소설가가 판검사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판검사는 잇는 공부를 달달 외워서 하는 거지만 소설가들은 창작을 하는 거잖니. 창작은 없는 것에서 만들어내는 거야. 그건 정말이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야. 문화적인 일이나 문학, 예술 이런 쪽이 돈 안 되는 일인 게 안타깝지만 어쩌겠니. 그래도 사람은 예술을 알아야 해. 네가 하고 있는 일은 없는 것에서 뭔가를 만들어 내는 일이야.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나는 잘 안다.
김경희 저 <아버지는 변명하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 299페이지
나는 작가처럼 아버지의 40대를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을 못 할 뿐 아니라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세계다. 작가가 되고 그 작가처럼 아버지에게 이런 응원과 격려를 받아보지도 못했다. 내가 작가가 되었을 때 아버지는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내게 아버지의 첫 기억은 이미 노인이 된 후였고 그 노인이 된 아버지와 10대 후반부터 싸우고 미워하고 증오에 가까운 원망을 하면서 살았다. 늦게 철이 들면서 아버지를 이해하고 아버지의 병간호를 하고 마지막까지 지켜보았지만 아버지와 여전히 풀지 못한 것이 많이 남아 있었다. 영원한 숙제로 남은 아버지와의 어색한 관계에서 나는 늘 다 자라지 못한 어린 딸의 심정으로 살았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글을 쓰기 시작했고 등단을 했고 책을 냈으며 큰 상도 받았다. 그때마다 가족은 물론 많은 사람들에게 축하를 받았다. 그런데 그런 순간마다 나는 속으로 아버지를 생각했다. 책이 나올 때마다 그 책을 들고 혼자 아버지에게 갔다. 술을 올리고 절을 하는 대신 무덤 앞에 책을 놓고 한참을 앉아있다 오곤 했다. 아버지 보고 계시죠? 라며 혼자 얘기했다.
아버지는 책을 좋아했다. 아니 활자로 된 것을 좋아했다고 하는 것이 맞다. 그 당시 고향집에는 별 책도 없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내 어린 기억 속 아버지는 늘 무언가를 읽고 있었다. 모락모락 담배 연기와 함께 그 냄새나는 변소에 쪼그리고 앉아 휴지 대신 내놓은 종이의 활자를 읽고, 얻어온 신문을 읽고, 우리의 지난 교과서를 읽고, 우리가 쓰다 버린 노트를 읽고, 끝없니 무언가를 읽던 아버지.
농한기인 한겨울 동네 어른들이 마을 회관에 모여 윷을 놀고 화투를 치던 때, 방 한 귀퉁이에 한쪽 다리를 괴고 누워 새농민을 읽던 아버지가 선명히 떠오른다. 아버지가 그 농한기 마을 회관 방을 찾은 건 다른 어른들처럼 놀이를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회관에 비치된 새농민이나 지난 신문들을 읽기 위한 것이란 것을 그때 깨달았다.
내가 결혼하고 나서 10년이 채 안 돼 돌아가신 아버지는 그 전 일 년 정도를 내 집에 자주 오셨다. 간경화를 앓았고 결국 간암으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내가 병원을 모시고 다녔기 때문이었는데 시골에서 안양의 병원까지 다니려면 매번 하루 이틀 묵어야 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거실 방을 차지하고 마냥 행복해 보였다. 우리 세 딸들의 재롱을 기쁘게 바라봤고 그때까지 당신 자식들에겐 인색했던 무릎도 선뜻 내주곤 했다. 막내의 엉덩이를 토닥이고 예쁘다. 예쁘다 하셨다. 그리곤 아이들과 함께 아이들 책을 읽었다. 예의 그 포즈로 바닥에 누워 한쪽 다리를 반대편 다리에 괸 채로.
지금도 내 딸의 기억 속에 외할아버지는 우리 집에 오시면 늘 누워서 책을 읽던 모습으로 남아있다. 그때 아버지가 했던 말도 떠오른다.
“네 집에 오면 책이 많아서 참 좋다.”
다른 자식들 집과 우리 집은 확실히 달랐다. 아버지 말처럼 우리 집엔 책이 많았다. 거실 방 가득 다른 가구 없이 책장이 벽마다 놓여있었고 그 책장마다 책이 가득했다. 아버지는 특히 손녀들이 읽는 책을 좋아했다. 그리고 실제로 재밌다고 하셨다.
“니들은 좋겠다. 엄마가 이렇게 책을 많이 사줘서.”
그랬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내게도 딸들에게도 책값을 아끼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때 어린 나에게 책을 사주지 못해 미안했을까? 나는 나이를 먹으면서 자꾸 깨닫게 된다. 내가 책을 좋아하는 것은 전부 아버지의 DNA 아닐까?
그런 내가 책 쓰는 작가가 되었다면 아버지 역시 그 작가의 아버지처럼 분명 기뻐하지 않으셨을까? 난 늘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책과 관련한 일이 있을 때마다 아버지를 찾아갔었다. 그 작가처럼 아버지에게 그런 응원을 듣고 싶어서 그 작가의 아버지처럼 나를 자랑스러워해 주길 바라서 분명 그랬을 거라 믿어서...
그 인터뷰가 실제로 내 아버지가 내게 해주는 말 같아서 울컥 터져버린 눈물이 쉽게 그치질 않았다. 카페 한 구석에서 누가 볼세라 계속 눈물을 훔치면서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당신 나이 마흔여섯에 낳은 막내를 온전히 사랑할 줄 몰랐던 내 아버지. 그런 아버지와 사사건건 부딪히고 그런 아버지로부터 멀리 달아나려고만 하던 못된 딸. 내 아버지 역시 방법을 몰랐을 뿐이었던 것은 아닐까. 왜 그러셨냐고 묻지 않았으니 대답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을까.
아버지와의 가장 어릴 적 기억은 아버지의 등에 업혀서 어딘가를 가던 기억이었다. 아버지에겐 막걸리 냄새가 났고 걸음은 조금 비틀거렸다.
“혜정아 아빠라고 불러봐”
그 장면이 떠오르면 자꾸 눈물이 난다. ‘아버지’에 비해 ‘아빠’라는 말이 어색하던 시절이었다. 늙은 아버지는 어린 딸에게도 술김이 아니라면 부끄러웠던 게 아니었을까? 젊은 아빠들처럼 아빠라고 불리고 싶었던 늙은 아버지.
단 한 번도 ‘아빠’라고 다정하게 부르지 못했다. 나는 정작 그 다정한 호칭 한 번 불러주지 못했으면서 아버지가 준 상처만 생각하고 아버지를 미워하며 자랐으니 나는 아버지에게 얼마나 얄밉고 못된 딸이었을까.
언젠가 나도 아버지에 대한 책을 써야겠다. 그때 나도 마지막 문장을 그렇게 써야겠다.
“이 책을 나의 아버지 김용호 님에게 바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