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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27일간의 여행일기

27일간 아침마다 일기를 썼다.

생각해보니 방학숙제 제출용으로 며칠씩 몰아썼던 초등학교 시절의 일기와 비 정기적으로 썼던 사춘기 시절의 일기 외에 일기를 써본 기억이 없다. 늘 글을 쓰며 사는 것이 운명이고 천직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일기에는 그토록 인색했었다. 아니 어쩌면 내가 쓰는 모든 것이 나의 기록이라 생각해서 더 그랬을 수도 있겠다. 그랬던 내가 독일의 딸 집에서 습관처럼 이른 아침마다 전날의 일을 더듬어 일기를 쓰고 있었다.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참으로 성실하게.

결혼한 딸의 신혼집 첫 방문을 빙자한 독일 여행을 기획하고 출발 전날 밤 깨달았다. 사랑은 더하는 것이 아니라 빼는 거라는 것을. 욕심껏 채워지는 딸의 것만큼 나의 몫은 빼고 또 빼는 것임을. 내가 아끼고 가져가고 싶은 옷은 부피가 컸고, 늘 필수로 챙기는 노트북은 무거웠다. 둘째가 사준 쿠션 좋은 운동화역시 부피에서 밀렸고 여행 중 읽으려고 챙겼던 책들은 딸이 부탁한 책들에 밀려 다시 책장으로 돌아갔다.

참기름, 고추장, 매실장아찌, 명이나물, 미역줄기, 무말랭이, 건표고, 건고사리, 신제품 과자, 결혼 앨범, 액자 등등 챙겨야 하는 물품은 끝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딸이 고대하는 책 30여 권, 그것은 나 대신이라도 비행기를 태워야 했다.

딸의 몫이 늘어날수록 내 몫의 여행용품은 중요도에 따라 자꾸 밀려났다. 여행 내내 입을 가벼운 옷 몇 벌과 속옷, 스니커즈 한 켤레, 비행기에서 읽을 책 한 권, 메모용 노트 한 권. 짐만 봐서는 2박 3일 국내 여행 수준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애나 어른이나 하지 말라는 짓은 더 하고 싶은 법이다. 딸의 만족감 뒤에 나는 노트북을 가져가지 못한 아쉬움이 살아났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노트북을 가져갔다한들 그다지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지금까지 그랬다. 여행을 많이 다녔지만 여행기를 착실히 써 본 적이 별로 없다.

그 여행 첫날 새벽에 깨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이 일기를 쓰고 싶다는 것이었다. 처음 와 보는 딸의 신혼집. 딸과 사위가 곤히 자고 있을 시간에 내 방 책상 앞에 앉으니 난 그냥 여행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홀가분함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나는 갑자기 주어진 자유가 기뻤고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여행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면 그런 기분에 맞게 부담 없이 여행 일기를 써볼까?

아쉬운 대로 메모용 노트에 어리바리하고 대략 난감이었던 입국 과정부터 썼다. 문제는 내 글씨체가 크고 개발새발인데 비해 노트가 너무 작아 불편하다는 사실이었다. 다른 계통만 장비빨이 있는 것이 아니다. 문학도 장비빨이다. -시비 사양. 지극히 주관적인 내 주장이다.- 처음엔 그냥 단순히 중고생들이 쓰는 가벼운 노트 한 권 사려고 했다. 그런데 없었다. 딸네 집 길 건너에 외국인 학교도 있었지만 우리처럼 문방구도 없었고 기껏 찾아간 서점 노트 코너에 내가 찾는 그 수수한 노트는 찾을 수 없었다. 반면에 딸이 추천한 노트는 너무 부담스러웠다. 가격도 우리 돈 3만 원이 넘었고 노트 자체가 이건 대가들이나 쓰면 어울릴 만큼 고급스러웠다.

“어우 야, 노트에 기가 죽어 못 쓰겠다. 이 비싼 걸 사놓고 다 못 쓰면 아까워서 어떡해?”

“튼튼하고 두꺼운 게 다 못 쓰면 딱 냄비받침용이네. 그냥 사.”

몇 번이나 주저하던 나의 망설임과 낭비에 대한 죄의식을 한 번에 해결하며 딸이 10유로 지폐 몇 장을 내놨다. 그렇게 간지나는 노트 한 권을 덜컥 사버렸다.

그러니까 여기 쓴 글들은 노트 값이 아까워 노트 값 하느라 쓴 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믿거나 말거나 내가 이렇게나 소박하고 물욕에 약한 사람이다.

그렇게 원래 계획이었던 17일간 새벽마다 하루도 빠짐없이 일상을 기록했다. 여행 일기면서 여행 중 딸 부부와의 일상을 기록한 글들로 노트가 채워지고 있었다. 17일간의 여행이 끝나고 귀국 전날 받은 PCR 검사에서 양성 판정을 받고 열흘을 더 머물렀다. 그렇게 나의 여행이 27일로 다시 늘어났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고 기다리는 사람도 없지만 이 글은 27일간의 여행 기록이다. 기록해두지 않으면 점점 희미해질 것이고 특별하고 재밌었던 여행이 별 의미 없어지는 것이 아쉬웠다. 무엇보다 새벽마다 행복했던 일기쓰기가 누구나 하는 일처럼 당연한 일이 되는 게 아니라 나만의 특별한 추억으로 만들고 싶었다.

글 쓰는 사람으로 사는 것은 내 팔자소관이다. 처음 계획대로 싸구려 일반 노트를 구입했더라면 그렇게 성실하게 쓸 수 있었을까? 인정하기 힘들지만 노트가 열 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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