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가라사대(13)

펜트하우스와 상선약수

by 김혁

날씨가 좀 풀리자 놀자는 오랜만에 집 근처에 있는 약수터를 찾았다.

야트막한 뒷산 중턱에 자리 잡은 약수터는 놀자처럼 나이도 지긋하고 시간도 많은 사람들이 아침저녁으로 즐겨 찾는 산책 코스였다. 그런데 코로나 사태 이후에 폐쇄되어 아무도 이용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입춘이 지나자 마음이 들뜬 탓인지 몸이 좀 근질거리기도 하고, 혹시나 접근금지 명령이 풀렸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가보니 아직 그대로였다.

“확진자가 이렇게 줄어들지 않고 계속 나오는 걸 보니, 금년에도 시원한 약수를 마시기는 글렀네---.”

놀자는 혼잣말을 투덜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아쉬운 대로 근처를 어정거리며 바람을 쐬다가 돌아오는 데, 약수터 입구에 오래전부터 걸려있는 낡은 팻말이 눈에 뜨였다.

“상선약수(上善若水)라-!”

늘 보아오던 글귀인데도 오늘따라 유난히 눈길을 끌었다. 시국이 시국이니만치 평소와는 아주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코로나로 지쳐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아니 마구 쓰러져 가고 있는 서민들에게 그야말로 약수처럼 시원하게 문제를 해결해 줄 방책은 과연 무엇일까. 만일 노자가 살아서 돌아온다면 어떤 처방을 내려줄 것인가, 몹시 궁금했다.

“도덕경에 나오는 <상선약수>는 워낙 유명해서, 꼰대들이 아랫사람한테 잔소리할 때 단골로 써먹거나, 여기저기 많이 갖다 붙이는 말이지.”

“암만! 가장 으뜸가는 선은 물과 같은 것이고, 그렇게 순리대로 순응하며 살라고 하니 얼마나 좋은 말인가.”

“근데 노자는 왜 으뜸가는 선을 최선(最善)이라 하지 않고 상선(上善)이라고 표현했을까?”

“맞아. 가장 좋고 훌륭한 것을 최선이라고 하지, 아무도 상선이라고 하지 않는데 말이야.”

“그리고 으뜸가는 선이라는 말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상해. 선이면 다 같은 선이지, 어떻게 으뜸가는 선이 있고, 다음가는 선이 있을 수가 있어. 무엇을 기준으로 그렇게 나누는 거야?”

“그야 대의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거나, 평생 모은 돈을 사회를 위해 희사한다거나 하면 으뜸가는 선이라 할 수 있고, 그렇지 않은 소소한 선행이면 보통의 선이고, 뭐 그런 것 아닐까?”

“허허, 그렇지 않아. 왕이 부처 앞에 바친 백 개의 등은 밤사이에 기름이 다 되어 꺼졌는데, 가난한 노파가 재산을 털어 바친 등 하나만은 계속 불이 켜져 있었다는 고사에서 나온 빈자일등(貧者一燈)이라는 말도 있듯이, 무엇보다 정성이 중요한 거야.”

“그건 그렇지.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정성에도 많고 적음의 차이가 있는 게 엄연한 현실이잖아.”

“근데 그걸 누가 나서서 상선(上善)이다, 하선(下善)이다 하고 칼로 무 자르듯이 판정을 할 수 있냐고. 안 그래?”

“그러고 보니 그러네. 그리고 하선(下善)이라는 말은 존재하지도 않아. 도덕경에 아예 나오지도 않잖아.”

“그렇지. 이거 뭔가 해석이 이상해---.”

놀자는 이렇게 혼자서 얘기를 주고받으며 뒷산을 천천히 내려왔다.


오후에 놀자가 모처럼 만에 출판사에서 보내온 원고를 교정하고 있는데, 일전에 양꼬치를 먹으며 몽골 초원에다 목로주점을 열자고 의기투합했던 두 친구가 찾아왔다. 옥탑방 단골손님들이었다.

“얘들아, 요새 <펜트하우스>라는 드라마가 인기라던데, 여기도 일종의 펜트하우스야. 안 그래?”

모 공기업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다가 은퇴한 친구가 옥탑방을 둘러보며 너스레를 떨었다.

“암만! 옥상이라 조용하고 전망 좋지, 애인하고 밤새 뒹굴어도 누구 하나 터치하는 이 없지. 펜트하우스가 뭐 별건가?”

백수 친구가 맞장구를 쳤다.

“예끼, 이런 자발머리없는 친구들 같으니! 그리 좋으면 늬들이 여기 와서 살아, 히히히! 근데 펜트하우스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가 인기라고?”

“응. 최고급 아파트 로열 층에 사는 인간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음모, 사기, 배신, 불륜, 횡령, 살인, 폭행, 복수, 치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드라마야. 거기에 나오는 인간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다 우리가 아는 양심이나 상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오로지 자신의 탐욕을 채우려는 파충류적인 욕망만 가득할 뿐이지. 정말 독종들이야.”

“야, 그거 엄청 재미있겠다. 언제 한번 봐야지, 히히! 근데 그런 드라마가 아직도 그렇게 인기가 있냐?”

“인간들의 욕망이 끝이 없듯이, 그런 드라마를 보려는 인간들의 욕망도 끝이 없기 때문이겠지.”

“그렇구먼. 내가 요즘 출판사 알바로 교정을 보고 있는 책의 내용도 <독종론>인데, 그것 참 재미있군.”

“독종이라면, 악마 같은 연쇄 살인자나 극악무도한 흉악범들을 말하는 거야?”

“그게 아니고, 현재 살아있는 모든 인류는 알고 보면 다 독종이라는 거지.”

“뜬금없이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럼 그동안 인류가 피땀 흘려 가꾸어 온 역사와 문화의 발전을 깡그리 무시하자는 거야?”

“그런 얘기가 아니고,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지난 수만 년 동안, 이 지구 상에서 벌어진 그 많은 전쟁과 살육과 투쟁과 탄압 그리고 빙하기와 기근과 홍수 같은 온갖 악조건 속에서, 남보다 더 악착같은 생존능력을 가진 독종들만 살아남았고, 현재 인류는 그 후예라는 얘기야.”

“허허, 그거 말 되는 소리네. 그러고 보니 인간들이 맨날 박 터지게 쌈박질을 하는 이유도 거기 있었구먼.”

“지금 세상에도 독종들이 판을 치고 득세하는 걸 보면 맞는 말 같아. 현재 우리 사회의 상류층이나, 아까 얘기한 그 드라마에 나오는 인간들처럼 말이야.”

“근데 그게 진화론에서 말하는 적자생존 이론과는 어떻게 다른 거야?”

“적자생존은 ‘환경에 잘 적응하는 종이 살아남는 데 유리하다’는 이론인데, 나중에 제국주의자들이 약육강식의 논리로 왜곡해서 약소국 침략을 정당화하는 데 써먹었지. 내가 얘기하는 독종론은 적자생존의 내용을 나름대로 설명하고 있어. 독하기 때문에 힘든 환경에 적응을 잘할 수 있었다는 거지. 한마디로 말해서, 인간은 누구나 다 독하다는 얘기야, 히히!”

“우리 주위에 보면 정말로 착하고 마음이 여리고 순한 사람들도 많은데, 그건 어떻게 설명할 거야?”

“상대적으로 순하게 보일 뿐이지. 그리고 독한 것과 악한 것은 다른 거야. 독하다고 꼭 악한 것은 아니니까.”

“그건 그렇지.”

“그리고 그들도 긴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절대 순하다고 할 수 없어. 환경이 바뀌면 언제든지 독종으로 변할 수가 있지. 한나 아렌트가 말한 그 유명한 ‘악의 평범성’도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잘 이해가 돼.”

“사실 우리도 독종이 맞아. 그 험하던 군부독재 시절 다 거치고 지금까지 살아남은 걸 보면, 하하하!”

“암만! 알고 보면 이 세상에 진짜로 만만한 놈 하나 없다니까, 히히히!”

놀자와 두 친구는 <독종론>에 대해 계속 토론을 이어갔다. 그리고 진화의 과정에서 독종들에게 희생되어 무대의 뒤편으로 사라져 간 수많은 순수한 존재들에 대해 깊은 경의를 표했다. 그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지금의 생명체들도 존재하기 어려웠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먼 과거의 일만이 아니라, 현재 우리 주위에서도 밥 먹듯이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 때문에, 올바른 공공선의 확립이야말로 언제나 중요한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늬들 상선약수라는 말 알지?”

놀자가 말머리를 그 문제로 돌렸다.

“알지. 예전에 약수터나 경로당이나 이발소 같은 데 많이 붙어있던 거잖아.”

“그래.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이 순리대로 사는 게 으뜸가는 선이다, 뭐 그런 말 아니야?”

두 친구가 아는 체를 하면서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맞아. 다들 그렇게 알고 있지. 근데 나는 해석을 좀 다르게 해 봤어.”

“어떻게?”

“사회 고위층이나 상류층에 있는 사람들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아래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선을 행하며 살아야 한다!라고.”

“와, 그거 참신한 해석이네. 그리고 그럴듯하네. 흔히 말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뜻하는 거다, 이거지?”

“응. 어느 사회고 고위층이나 상류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와 사회에 대한 책임을 일깨우는 얘기라고 할 수 있지.”

“참 좋은 얘기야. 한마디로 말해서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라는 우리 속담과 같은 거네.”

“맞아. 바로 그거야!”

“그렇다면 그다음에 이어지는 말들은 무슨 뜻이야?”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는 그런 선을 행하고,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으로 흐르기 때문에 도와 가깝다. 그러니 고위층과 상류층도 그렇게 실천하며 살아라!”

“얼-쑤!”

“특히 앉을자리를 잘 살펴서 거처를 정하고, 마음을 깊은 연못처럼 잘 다스리고, 사람과 어울릴 때는 인자하게 잘 대하고, 말은 신뢰가 가게 잘 헤아려서 하고, 백성을 다스릴 때는 정의롭게 잘 다스리고, 일은 능력에 맞게 잘 처리하고, 행동은 때를 맞춰서 잘 실행하고, 이렇게 하면서 다투지 않으면 허물이 없을 것이다! 이런 얘기지.”

“허허, 성인군자가 따로 없네그려!”

“이거 너무 이상주의적인 얘기 아니야? 그렇게 고상하고 기품 있는 고위층과 상류층이 있을 수가 있어?”

“있기는 개뿔! 현실은 오히려 정반대지. 더 많이 움켜쥐려고 하고, 더 많이 누리려고만 들지. 그래서 사회가 늘 이 모양 이 꼴인 거야.”

“맞아. 옛날의 참된 지도자는 ‘먼저 천하의 근심을 근심하고, 나중에 천하의 즐거움을 즐긴다.’라고 했는데, 지금 지도자들은 재미는 제일 먼저 보고, 근심은 아예 안 하거나 남에게 미루기가 일쑤지.”

“하지만 노자 때도 사라져 없어진 도를 이제 와서 어떻게 되찾겠다는 거야.”

“차라리 새로운 노자가 출현하기를 기다리는 게 낫겠다. 안 그래? 하하하!”

“암만! 그래서 이렇게 펜트하우스에서 뒹굴면서 기다리는 중이야, 히히히!”


“참, 펜트하우스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거 뭐 없냐?”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놀자가 짓궂은 표정으로 친구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또 무슨 이상한 얘기를 하려고 그러는 거야?”

은퇴 친구가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아하, 그거 말이야?”

백수 친구는 대번에 알아듣고 놀자를 보며 얄궂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바로 그거, 히히히!”

“젊디 젊던 시절에 <플레이보이>와 <펜트하우스>가 우리의 외로움을 참 많이 달래주었지.”

“그래. 지금 관점에서 보자면 순진하고 촌스럽기까지 하지만, 가난하고 고독하고 불쌍한 청춘들에게 그 화보 사진들은 그야말로 꿈과 환상 그 자체였지.”

“종이 재질은 또 얼마나 매끄럽고 고급스러운지 꼭 여자 살결을 만지는 것 같았지. 하지만 그 잡지들은 성에 대한 잘못된 관념을 어린 영혼들에게 낙인찍은 원흉이라고 할 수도 있어.”

“우리 잘못만도 아니야. 한창 성에 대해 호기심이 왕성하던 때,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단 한 번도 성교육을 받거나, 성에 대한 진지한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래. 단 한 번만이라도 성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소중한 것이고 또 아름다운 것이지만, 돈이나 권력으로 취하면 추한 것이 된다는 말을 들었더라도 많이 달라졌을 텐데---.”

“지금도 그렇지만, 늘 숨기고 감추고 왜곡하고 억압하고 하다 보니 '이상한 나라의 거시기'가 되고 말았지.”

"근데 그 두 잡지가 인터넷으로만 운영하고, 발행을 중단했대. 각종 야동들이 너무나 판치는 바람에 경쟁력을 잃고 운영난에 빠졌다나 봐."

"허허, 이런 변이 있나!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구만, 쯧쯧!"

“참, 그거 알아? 영국의 유명한 천체 물리학자인 스티븐 호킹 박사와 노벨상을 받은 미국의 킵 손 박사가 언젠가 백조자리 X-1이 블랙홀인가 아닌가 하는 걸 가지고 내기를 했었대.”

“그래서?”

“흥미롭게도 성인 잡지를 걸고 내기를 했는데, 블랙홀이 없다고 주장한 호킹 박사가 져서 킵 손 박사에게 펜트하우스 1년 정기구독권을 사줬대. 호킹 박사가 이기면 플레이보이 잡지를 받기로 했었다네, 히히!”

“거 참 재미있는 물리학자들일세, 그려! 갑자기 어려운 천체 물리학이 가깝게 느껴지는구먼.”

“그 후 스티븐 호킹 박사가 이런 사실을 자신의 책에다 까발리자, 킵 손 박사의 와이프가 남편을 오랫동안 아주 호되게 쪼아댔다네.”

“역시 여자는 남자의 영원한 블랙홀이라니까, 하하하!”

“그럼, 그럼! 블랙홀이자 영원무궁한 18홀이지, 히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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